이혈/ 장윤정

지금도 흐르고 있는 미처 몰랐던 미래에 대하여

– <이혈(異血) – 21세기 살인자> 리뷰-

장윤정

 

작품명: <이혈(異血) – 21세기 살인자>

작: 김민정

연출: 박장렬

단체: 연극집단 반

공연일시: 2014년 9월 26일(금)~10월 19일(일) 평일 8시/ 주말 및 공휴일 4시

공연장소: 대학로 예술공간 SM

관극일시: 2014년 10월 (일) pm8:00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일제강점기, 단재 신채호 선생은 절치부심으로 새로운 미래를 기대했다. 그런데 반 백년을 넘어 근 백년에 가까울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지금, 어떤 미래가 진행되고 있는가? 지난 역사가 삶의 주변에 만연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너무 익숙하여 쉽게 스쳐버리고 있는 현재가 아닐까. 사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 누구도 지난 역사를 쉽게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매년 분개하고 친일파 잔재 숙청을 기대하며 다시금 충무공 열풍이 전국을 강타한다는 것은 전 국민의 평생 숙업 같은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저 강단 있는 말 한 마디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이혈(異血)-21세기 살인자>과 같은 존재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다. 삶이 바빠 역사를 잊을 수는 있다. 그건 고개 숙일 일이라기 보단 낯부끄러울 일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혈>과 같은 현상을 마주할 땐 다르다. 이것은 분명 고개 숙일 일을 만들게 한다.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반성과 함께 숙연해짐을 의미한다. 즉, 고요하고 엄숙해진다. 진중하고 신성한 역사적 사실을 대면했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사실은 알만큼 다 아는 흔하디흔한 역사 중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꼬집어 냈기 때문에 엄숙함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그 지점이 반성을 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위안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이미 누구나 아는 부분일 것이다. 과거 일본군이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고 어떤 태도로 일관하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여전히 매주 수요일마다 얼마 남지도 않은 피해자들의 집회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 피해자들의 아픔이 어떠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얻어내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지난 여러 매체들을 통해 더불어 교과서에서까지 알려주고 있다. 그렇기에 모두 안다고 생각했고 모두가 분개한다고 여겼으며 모두가 관심어리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혈>은 순식간에 이 믿음을 깡그리 무너뜨린다. 그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두의 관심이 사실은 무관심이었음을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혹시 눈에 보이는 역사적 문제의식 이외에 그 주변까지 돌아본 적이 있는가? 진심으로 그들을 위하여 목청을 높였다면 거기엔 진심어린 관심이 존재했는가? 우리는 대부분 그들의 직접적인 피해에 집중해왔지 그 피해로 인해 발생했던 결과엔 무지(無知)하다. 나아가 무관심했다. 다시 말하자면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들 사이에서 그 누군가는 출산의 고통을 겪었을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그 피해자의 자손 또한 함께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그들의 아픔은 누가 어떻게 보듬었는가? 어쩌면 그들은 무지(無知)로 인한 무관심 속에서 철저히 소외받은 것은 아닐까? 스스로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와 싸우며 동시에 무관심한 사회와도 싸워야 했을 것이다. 만일 진정으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면 단 한 번이라도 포괄적인 범위에서 그 소외된 존재들을 볼 수 있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우린 그러지 못했고 그런 관객들 앞에 <이혈>과 같은 공연이 등장한 것이다.

 

<이혈>은 공연으로서 세 가지 맥락에서 분석 가능하다. 첫 번째는 공연의 형식이다. 공연은 극중극 형식을 취하며 드물게 ‘웹툰’ 이라는 소재를 차용했다. 그리하여 비현실적으로 완벽한 살인 행위와 천재적인 인물 설정에 설득이 가능하며 살해당한 피해자들의 과장된 연기 또한 오락적 요소로서 이해된다. 다만 극중극 형식을 취하면서 정작 극중극의 형식이 모호하게 나타난다. 자살한 강준과 웹툰 속의 강준이 심리적으로는 동일한 인물처럼 느껴지나 분명 물리적으로 다른 존재이며 이로 인하여 현실과 웹툰이라는 극중극이 형성되는 것인데 정확히 어느 지점이 웹툰이며 어느 지점이 현실인지가 불분명하게 나타난다. 웹툰의 내용이 곧 현실과 다름없다는 의미로서 의도하여 모호하게 처리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처음부터 굳이 무엇 때문에 극중극을 차용한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애초에 극중극의 형식이 아니어도 전혀 문제될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라고 해버려도 크게 문제될 일은 없다. 더불어 ‘웹툰’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굳이 ‘웹툰’이 아니어도 무관한 형태다. 소설이어도 되었고 시나리오여도 상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웹툰’이라고 설정했다면 좀 더 그 설정을 활용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현재 여러 연극이 상연되고 있지만 실재 연재되었던 ‘웹툰’ 내용을 활용한 사례 외에 ‘웹툰’이라는 소재 자체를 형식으로서 활용한 사례는 많지 않다. 이 지점은 충분이 <이혈>만의 형식적 특색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공연 내내 갑작스레 커다란 망치로 내려찍는다든지 죽은 인물들이 춤을 춘다든지 비사실적인 형식들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연극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형태들이다. ‘웹툰’이라는 만화적 특색을 보여주기엔 다소 아쉬운 지점인 것이다. 극중극이나 ‘웹툰’이라는 특색 있는 형식들을 설정했다면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것이 더 이 공연만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 방법이라 짐작된다.

 

두 번째는 의미의 부분이다. 우선 공연 자체는 상당히 재미있다. 간단히 작품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강준이라는 웹툰 작가가 자살을 한다. 그의 죽음은 그가 그린 웹툰에 의미가 담겨있으리라 짐작되고 그 웹툰의 내용이 진행된다. 웹툰 속의 또 다른 강준이라는 인물은 여러 차례 연쇄살인을 하고 자신의 부모까지 죽인다. 자신의 부모는 일본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인데 알고 보니 할머니가 일본군위안부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가 뒤늦게 위안부였음을 알게 되어 스스로 그 위안부피해로 인한 결과물임을 깨달아 오열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늘 쥐고 놓지 않던 사진 속 당시 일본군을 찾아가고 그에게서 제대로 된 반성을 듣지 못하자 그의 딸을 되레 성적으로 폭행한다. 그로 인해 태어난 것이 웹툰 속 강준이었으며 그런 강준은 일본인 어머니로부터 어머니가 아닌 피해자로서 자신을 대함에 분노한다. 또,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회의를 느끼며 부모님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그 외에 웹툰 속에서 강준이 연쇄 살인한 사람들은 일본의 비윤리적 행위를 찬양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로 인하여 현실 속의 강준 또한 웹툰 속 강준과 동일한 아픔과 문제를 가진 것처럼 끝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절대 해결될 수 없는 갈등이 있으며 연쇄살인의 코드가 존재하고 분노하는 인물과 숨겨진 진실을 찾는 과정.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코드가 모두 존재한다. 그렇기에 많은 관객들은 공연이 주는 재미 자체에 만족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승부해야 하는 지점은 의미의 지점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무엇보다 이 작품이 의미 있을 수밖에 없는 부분은 단 한 가지 ‘우리가 차마 알지 못했고 잊었던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것은 모두가 ‘안다’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차마 몰랐던’ 부분인 것. 그런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위안부라는 1차적 피해자 아래에 또 다른 수많은 2, 3차 피해자들이 존재하며 우린 미처 그 부분까지 알지 못했다는 것. 그들이 지금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사실 ‘거기까지’ 관심이 없었다는 것. 이것만으로 이 작품은 얼마든지 가치 있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 작품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순식간에 뒤바뀔 수도 있음을 건드리고 있다. 피해를 받은 만큼 다시 도로 일본군 딸에게 피해를 되돌려주지만 사실 그것은 강준이라는 인물로서 모두의 아픔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실이다. 이 지점까지 염두에 둔다면 <이혈>은 충분히 더 깊이 있는 공연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공연은 이 지점들을 더 살려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피해 받은 강준이라는 한 인물의 오열만이 한 시간 내내 가득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한 가지 당부할 것은 무대 위에서 배우가 많이 소리치고 울어버리면 사실 관객은 울지 못한다. 역으로 무대가 울음을 눌러 담을수록 관객은 끝내 눈물을 흘려버리고 만다. 사실 공연 내내 울어야 할 지점은 너무나도 많았다. 강준의 아버지인 강한구가 생전 내내 자신을 보고 떨던 어머니가 왜 그랬는지에 대하여 깨달았을 때 울어야 했고. 강한구가 일본군 딸 에이코를 범했을 때 순식간에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되는 상황에서 울어야 했으며. 강준을 앞에 두고 스스로 피해자라고 했던 에이코의 모성에 배반하는 태도에서도 울어야 했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피에 대한 회의와 분노, 좌절에 가슴 깊이 오열해야 했던 강준 앞에서 울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이 공연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명확하게 만들어 주는 지점들이다. 단순히 강준의 격앙된 심리에 따라 극 또한 격앙된 채 흐르는 것 보다는 역으로 담담히 사실 관계가 진행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더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흥미와 재미를 좇다가는 오히려 이 작품의 미덕을 놓치게 되는 위험이 있다. 물론 흥미와 재미, 동시에 작품의 의미까지 더 두드러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격앙된 분위기를 조금은 가라앉히고 담담히 뼈에 사무칠 역사를 읊어내야 한다. 관객은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그런 강준을 마주해야 한다. 단순히 그동안 고아라서 부모가 없어서 외로웠던 강준이 아니라 무수한 매스컴과 사회의 관심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무관심 속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강준을 마주해야한다. 모두가 안고 가야할 역사의 죄를 혼자서 떠안고 자신의 대에서 끊어버릴 요량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강준을 마주해야한다. 그것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사의 진실이며 진심어린 숙연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자살, 살인 이런 행위로서 무겁다고 할 수 없다. 위안부의 문제이기 때문에 무거운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의 역사적 문제와 그 죄를 한 사람이 모두 안고 해결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무겁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지점을 조금만 더 염두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출과 연기의 맥락이다. 먼저 연기로서는 모든 배우들이 더할 것 없이 적합하게 해내고 있었다. 특히 강한구 역할의 김준삼 배우는 사실 가장 관객들의 심리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는 강준이라는 인물 이전의 강준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스스로의 존재에 대하여 환멸과 좌절과 호의, 더불어 미안함까지 느끼게 되는 최초의 인물인 것이다. 그런 감정을 더할 나위 없이 해냈다. 특히 그가 관객을 울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늘 자신을 무서워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해와 본인 또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미안함을 느끼는 태도. 그러면서 동시에 일본군 딸에게 가해를 하며 이내 미안함을 표하는 태도.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었으며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다양한 감정을 김준삼 배우는 적합하게 잘 표현하고 있었다. 일본군 딸로서 등장하는 에이코역의 권남희 배우 또한 가해의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겪었고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를 꾀하는 인물로 입체적인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다만 강준을 대하는 모습에서 단호하게 피해자의 감정만 느끼기 보다는 어머니로서의 감성도 존재하지 않을지 의문이 들었다. 만일 어머니로서 일말의 모성애가 느껴졌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에겐 치욕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모든 감정에 대하여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 같은 마음이 생긴다. 이 외에 주인공인 강준역의 원종철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는 우선 박수를 보낸다. 그의 에너지는 공연 시작부터 마지막 까지 극장 안을 가득 채웠고 그 에너지의 크기 또한 단 한 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원종철 배우는 최대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모두 쏟아내는 모습이었으며 강준이라는 인물이 느낄 수밖에 없는 분노와 좌절, 그와 동시에 어머니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내면. 아버지에게서 대물림 되는 피의 문제에 대하여 동류의식을 느끼는 모습. 이 모든 어려운 감정을 다 소화해내고 있었다. 단지 앞서 이야기했듯이 배우가 모든 것을 쏟아 내고 대신 다 울어버리면 관객은 덜 울게 되고 만다. 그러니 조금은 넘쳐흐르는 울분을 눌러 담는 아픔 또한 볼 수 있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스즈키역할의 신현종 배우는 일본 무사의 모습을 연기하였는데 특유의 일본인 정신이 드러나는 연기가 좋았다. 아버지로서의 스즈키와 일본인으로서의 스즈키, 한국인에게 겁탈당한 딸을 대해야하는 스즈키의 심리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딸을 대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아버지로서의 모습과 일본인으로서의 모습이 동시에 드러나야 하는데 이에 대하여 신현종배우는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김형사 역할의 김귀선 배우와 서형사 역할의 김윤태 배우는 합이 잘 맞는 콤비를 이루고 있었다. 누가 봐도 흔히 봐왔던 형사 같았으며 연륜 있는 형사와 능숙하면서 여유있는 형사의 모습이 잘 드러났다.이들과 함께 오해식 역할의 권기대 배우가 등장하는데 권기대 배우 또한 똑똑한 여성 프로파일러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이 세명의 인물들은 극의 무거운 분위기를 밝게 전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가벼운 말들이 오갈 수 있고 그 가운데에 오해식이라는 인물이 중심을 잡을 수는 있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이 세 명의 에너지가 유사하기에 이들이 다 등장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또, 프로파일러와 형사의 역할에는 분명한 구분점이 있겠으나 작품이 후반부로 갈수록 형사의 역할이 불분명해지면서 다시금 등장의 필요성을 의문스럽게 만든다. 이에 대해서는 작가와 연출, 배우가 함께 고민해 보아야할 지점이라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연기만큼은 탁월했다. 자신들이 맡은 배역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듯했으며 분위기를 적절하게 전환시키고 있었다. 소녀 역의 조예현 배우는 많은 말없이 등장한다. 위안부 역할과 어린 에이코 역할을 동시에 번갈아가며 등장하는데 많은 말없이 행동거지로 인물을 표현하는것에 있어서 잘 해내고 있었다. 특히 소녀로서 등장하여 강준에게 꽃을 주거나 가만히 앉아 앞을 응시하는 모습에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픔이 배어있는 모습이었다. 많은 대사 없이 분위기만으로 감정을 전달해내는 것에서 앞으로의 조예현 배우의 모습이 기대된다. 그 외 코러스로 등장하는 전종민, 김천, 송현섭, 이가을 배우는 웹툰 속 살해당하는 각 인물로 등장하거나 말단 형사로 등장하는데 각각의 캐릭터를 잘 살려내고 있었다. 특히 웹툰 속 살해당한 인물로서 등장한 이들은 마치 정말 일상의 주변 인물 그대로를 올려놓은 듯 실감나게 연기하고 있었다. 비중이 적은 것이 아쉬우나 앞으로의 작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혈>은 무엇보다 연출이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극중극 형식에 ‘웹툰’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내용으로 대신한다. 다만 한 가지, 이 작품이 전반적으로 ‘웹툰’으로서 진행되는 만큼 오히려 과장된 색깔들이 그로테스크함을 불러일으킬 수 도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지금의 <이혈>은 어둡고 무거운 느낌이며 회색의 벽과 무대가 등장한다. 인물들의 옷, 특히 에이코의 의상에서 강렬한 색채가 드러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어두운 느낌이다. 그렇기에 작품의 진중함의 효과를 더할 수 있었다. 다만 차후 다시 이 작품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좀 더 새롭게 역으로 너무 선명한 색감이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은 <이혈>이 ‘웹툰’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에 그 소재에 대하여 고민하길 바라는 점에서 권하는 바이다.

 

<이혈>에서 마지막 장면은 소녀가 강준에게 노란 개나리가 핀 나뭇가지 몇 가닥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녀가 선물한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어쩌면 차가운 겨울에서 따뜻한 봄을 전해준 것은 아닐까? 아마도 피해자인 소녀가 또 다른 피해자인 강준의 아픔을 알아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메시지였으리라 생각한다. <이혈>은 우선 그 등장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으며 작품의 메시지 자체가 미덕이었다. 앞으로의 고민은 이 의미를 어떻게 더 선명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방법의 문제일 것이다. 더불어 차후 또 다른 <이혈>을 대할 관객의 태도가 이번 초연과는 달리 미처 몰랐던 역사에 대한 충격에서는 벗어나있기를 바란다. 이미 이 또한 이제는 알게 된, 알고 있으며 관심을 보낸 역사의 일부가 되어 있길 기대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아직 역사를 잊지 않은 민족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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