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 흑백다방/ 김향

들리지 않는 음악소리, 침묵 그리고 함께 부르는 노래

– <흑백다방>(차현석 작·연출, 정성호·윤상호 출연, 76스튜디오, 2015.2.21.~3.14.)

 

김 향 (연극평론가)

 

  1.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방

 

<흑백다방>은 2014년 제14회 2인극페스티벌에 출품되어 작품상과 연기상(윤상호)을 수상한 작품이다. 제14회 2인극페스티벌에서는 순수창작 초연 작품을 공모하였고 50여 개의 지원작 중 열두 작품이 뽑혀 공식 참가작으로 공연되었는데, 그 가운데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인 것이다. 2인극페스티벌의 성과를 바탕으로 여러 차례 재공연 되었으며 이 작품을 연출했던 차현석 연출은 이 작품을 독립영화로도 기획 중이다. 소극장 무대에서와 다른 상상력을 보여줄 독립영화 <흑백다방>도 기대하게 된다.

2인극 <흑백다방>이 작품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주제의식과 더불어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사유의 여백을 만들어내는 연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무대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윤상호의 연기를 먼저 살펴보자.

이 작품은 1980년대의 끔찍했던 고문의 시대에 형사와 대학생으로 만났던 정성호(정성호 분)와 윤상호(윤상호 분)가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뒤 상담자와 내담자로 만나는 남포동의 한 ‘다방’을 배경으로 한다. 이 다방은 오래된 수동카메라들과 전화기, 1980년대 엘피판과 앨범 자켓 그리고 이와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지구본과 여행지 어딘가에서 구해왔을 듯한 물건들로 꾸며져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다방공간에서는 객석 바로 앞에 관객들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수족관이 설치되어 있고 턴테이블에 엘피판을 올려놓고 있는데도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지극히 사실적인 무대콘셉트와 빗소리 그리고 오래된 괘종시계 소리가 들리는 중에 관객들의 시·청각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큰 의미를 띤 장치 두 개가 설치되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윤상호(윤상호 분)가 등장하여 사건이 전개되는 가운데, 이 다방의 ‘들리지 않는 음악 소리’는 좀 더 구체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비를 잔뜩 맞은 채 헉헉거리며 다방으로 들어오는 윤상호는 친절하고 그러면서도 절도 있는 정성호와 달리, 커피를 흘리거나 과장되고 불안정한 태도를 보인다. 실없이 웃는 듯하면서도 눈가가 촉촉해진 채 연신 코를 훔치고 무대 전체를 이리저리 오가는 부산한 이미지를 풍긴다. 무엇보다 특징적인 행위는 내담자로서 자신의 얘기를 먼저 꺼내는 것이 아닌 정성호가 스스럼없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둘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방 선반들에 놓여 있는 엘피판들의 음악 이야기로 이어지고 윤상호는 80년대 음악 애호가인 정성호가 놀랄 만큼 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드러낸다.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던 정성호가 함께 음악듣기를 청하자 윤상호는 자신은 음악을 들을 수 없음을, 청각장애를 지녔음을 밝힌다. 그리고 그 이유가 오래 전에 정성호에게 구타를 당했기 때문임을 이야기한다. 순간 정성호는 침묵하고 윤상호는 그제서야 자신의 과거를 드러낸다. 관객들은 정성호가 과거에 대학생 윤상호에게 청각장애를 일으킬 정도의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로 인해 다방 공간의 ‘들리지 않는 음악 소리’가 특별한 의미를 띠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들리지 않는 음악 소리’는 단순히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한 설정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 있는 기호체로 인식되게 되는 것이다.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방 공간은 20년 이상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온 윤상호의 내적 상황의 환유적 표현이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윤상호가 20년이 넘도록 음악에 대한 추억을 귀가 아닌 눈으로만 경험해야 했던 ‘깊은 슬픔’을 턴테이블은 돌아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 상황으로 표현했다고 보이는 것이다.

모든 사실이 드러난 상황, 폭력을 행사했던 경찰과 무고한 피해자의 재회라는 극적인 순간은 폭풍 전야와 같은 긴장을 유발한다. 정성호는 자신의 죄과로 청각장애인이 되어 나타난 윤상호에게 ‘자신을 칼로 찔러 죽여’ 그 상처를 해소하라는 처방을 준다. 그러나 애초에 이것이 목적이 아니었던 윤상호는 울며 머뭇거리고 이때 정성호는 과거에 자신이 윤상호를 고문할 때와 같은 폭압적인 분위기를 재현하여 그를 자극한다.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종이를 말아 구타를 가하는 등 20년 전과 비슷한 가해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배우 윤상호의 연기가 진가를 발휘하다. 그는 흐느끼며 공권력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나약한 소시민의 소리 없는 통곡을 들려준다. 소리 높여 자신의 고통을 표출하지 못하고 내면으로, 내면으로 침잠하는 듯한 정서적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그러다 곧 배우 윤상호는 탄력있는 반박에 나선다. 그는 가해자가 되기보다 또 다시 피해자가 되어 정성호를 살인자로 만들고자 한 계획을 실행한다. 정성호 아내의 유골을 파왔다며 흰 가루를 커다란 수족관에 뿌리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소리 없는 통곡으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던 배우 윤상호는 이 장면에서는 반대로 웃음을 유발한다. 결코 웃음이 유발될 수 없는 상황에서의 관객의 반응이다. 이는 배우 윤상호가 자신이 맡은 배역이 진심을 가린 채 연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연기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실제로 정성호를 살인자로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진심을 알고자 하는, 그의 내면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하는 극 중 연기였다고 보이는 것이다. 관객들은 윤상호의 극 중 연기에서 놀이적 면모를 경험하고 자연스레 웃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배우 윤상호는 극적으로 긴장된 상황에서 긴장과 이완의 감정을 반복하면서 극 중 윤상호라는 인물을 연기했다고 할 수 있고 관객들은 공감하거나 긴장을 풀고 웃으면서 그의 연기놀이에 감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가해자의 침묵 속에 내면화된 폭력성

 

배우 윤상호가 피해자로서 그 상처받은 몸을 역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에 비해 배우 정성호는 ‘침묵’과 내지르기를 반복한다. 윤상호가 과거를 드러낸 순간 정성호는 말을 잃고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조용함 또는 가해자로서의 반성의 태도라기보다는 윤상호의 놀이적 태도, 즉 그가 왜 자신을 찾아왔을까에 대한 답과 그의 상처를 고쳐줄 처방을 찾기 위한 순간으로 보인다. 정성호는 이미 폭력적 수사로 인해 죄과를 치른 상태였고 무엇보다 자신 때문에 아내가 병을 얻어 저세상으로 간 상태였기 때문에 죄의식을 벗고 타인의 아픈 내면을 치유해 주는 일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었다. 그 ‘침묵’은 윤상호의 놀이, 즉 정성호를 다시 살인자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라는 놀이를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정성호는 윤상호의 계획과는 반대로 윤상호로 하여금 가해자의 위치에 서도록 유도한다. 눈물을 흘리며 과거 이야기를 해 내담자와의 신뢰를 쌓으려 하던 애초의 정성호의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차갑고 잔인한 모습이었다. 이 상황을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응축된 행위로 표현하는 배우 정성호의 연기는 윤상호의 연기만큼이나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배우 정성호의 연기는 그 역시 하수인으로서 또 다른 피해자였다는 상식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여전히 인간 삶을 억압하는 내면화되어 있는 공권력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배우 정성호는 극 중 인물 정성호에 몰입해 관객으로 하여금 그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극 중 인물을 내면화된 공권력이라는 기표로 읽도록 사유의 여백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극적 흐름에 따른 ‘침묵’과 이어지는 폭력적인 행위는 관객들에게 여전히 공권력의 폭력성이 살아 있음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자신을 죽이라며 윤상호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정성호는 아내의 유골을 훼손했다는 윤성호의 말만 믿고 순간 돌변하여 그를 죽이려 칼을 든다. 그 순간 잠시의 ‘침묵’이 발생하고 이때의 침묵을 깬 것은 오후 3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였다. 이 소리는 마치 정성호를 현재 상담자로서의 자아로 불러들이는 소리 같았다. 이 소리에 정신이 깬 정성호는 칼을 놓고 살의를 내려놓는 것이다. 그의 태도가 변하자 왜 자신을 죽이지 않냐며 항변하는 윤성호를 향해 던지는 정성호의 말은 놀이하듯 연기하는 윤상호의 연기에 유희적인 말로 답하는 것 같았다.

“다방에서 사람 죽는 거 봤어? 다방은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하는 곳이야.”

이 대사로 윤상호의 놀이는 정성호의 승리로 끝나고 관객들은 안도의 숨과 더불어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옴을 경험한다. 관객 역시 이 작품을 보며 원했던 것이 폭력적 해결이 아닌 소통의 물꼬가 아니었던가.

 

  1. 함께 부르는 노래

 

정성호가 윤상호의 잠바를 걸쳐 입고 유골이 든 윤상호의 가방을 들고 실제 아내의 유골을 확인하기 위해 나가자, 다방에 남겨진 윤상호는 정성호의 물건들을 만져보고 그의 재킷을 입고 그가 그리던 그림에 손을 대보고 그의 구두도 신어 보며 ‘정성호가 되어 본다’. 정성호와 윤상호가 서로의 옷을 바꿔 입는 것은 두 인물이 서로의 입장이 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연출적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윤상호는 놀이에 졌지만 드디어 20년 동안 쌓아 두었던 정성호에 대한 원망과 서러움을 표출하고 있는 중이며 정성호는 놀이에서 이겼지만 그 동안 상상하지 못했던 가해자의 뼈아픈 죄과를 다시 체험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의 물꼬는 정성호가 다시 돌아와 진짜로 윤상호가 아내의 유골을 파온 것인지 되묻는 것으로 이어진다. 윤상호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아 하는 정성호에게 윤상호는 대답 대신 커피물을 뱉고 정성호 역시 커피물을 끼얹는다. 여전히 이 둘은 팽팽한 대립의 힘을 보여주는 듯했지만, ‘윤상호의 요구’를 정성호가 들어주는 순간 둘 간의 진정한 대화가 시작되는 듯했다.

“지금 나오는 노래는 무슨 내용의 노래입니까? 궁금한데 선생님의 입모양 좀 볼 수 있을까요? 부탁드립니다. 노래는 시적이니까 입모양 좀 크게 불러 주세요.” 정성호는 윤상호의 엉뚱하면서도 간절한 요구에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라는 가사의 노래(노고지리의 ‘찾잔’)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도 입모양을 좀 더 크게 하기 위해 애쓰면서.

유희와 사유를 만들어내는 <흑백다방> 연출과 연기 뒤에 남는 문제는 있다. 이 둘의 개인적인 용서 또는 화해로 고문의 역사가 결코 잊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배우 윤상호는 커튼콜 뒤 탁자 위에 새로운 흰 찻잔 두 개를 올려놓고 퇴장한다. 그 찻잔은 다수의 가해자와 피해자에게 필요한 찻잔일 것이다. 아직도 다수의 피해자들이 그날들의 상처로 인해 고통 받고 있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진상 규명 및 처벌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잊혀서는 안 될 사건에 ‘세월호 참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글은 <한국연극> 2015년 3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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