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김남석

 

기다리는 사람들

– <갈매기>

김남석(부경대 교수, 연극평론가)

 

 

연출: 김소희
단체: 연희단거리패
공연일시: 2015/08/02 ~ 2015/08/03
공연장소: 밀양연극촌 가마골소극장

 

 

1. 대화를 가두는 테이블: 언어와 구성

 

김소희 연출의 〈갈매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막은 2막이었다. 그것은 독특하게 놓인 한 테이블 때문이다. 관객 앞(무대 전면)에 일렬로 늘어선 테이블 그리고 그 앞의 의자. 테이블을 등받이 삼아 이 불편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까지나는 ‘떠날 마차’를, 니나는 ‘막연한 기대와 동경’을, 마샤는 ‘올 수 없는 사랑’을 기다린다. 어쩌면 세여인 모두 연인과 사랑과 미워할 수 없는 남자와 그 남자를 기다려야 하는 숙명을, 모두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2막의 이러한 동선과 배치는 인상 깊다. 체홉의 2막이라는 사실을 더하면, 더욱 흥미롭다고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체홉의 4막 구도를 ‘도착/만남/충돌/떠남’이라는 도식적 구도로 이해한다면, 2막이 만남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실 기다림이라는 정서는 일상적인 감정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이들이 〈갈매기〉의 2막을 지루하다고 느끼기 일쑤이고, 자칫하면 〈갈매기〉를 더 이상 읽지 않거나 보지 않는 이유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연희단거리패는 이 2막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녀들’은 기다린다. 곧 그녀들 곁으로 한 사람, 두 사람 남자들이 모여든다. ‘그녀들’처럼 ‘그들’도 무언가를 기다리는 인물들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마샤의 관심을 끌려는 남자, 여배우를 바라보는 의사, 여배우의 오빠, 심지어는 그녀들의 기다림을 무산시키려는 집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하나씩 등장하여, 여인들 주변에 배치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2막은 소조(塑造)처럼 인물들과 그들의 정서 그리고 기다림의 지루함을 뜯어 붙여 만든 막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장면 축조법은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를 밀어내는 식의 일직선적 인물 조형에서 한 걸음 빗겨선 방식이기 때문에, 사뭇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2막에서 배우들의 흥미로운 동선을 이끄는 힘은 ‘탁자’이다. 김소희 연출의 〈갈매기〉에서 두 개의 탁자와 몇 개의 의자, 혹은 긴 장의자는 막의 구성을 이끄는 기본 동력을 생산하는 오브제이다. 탁자와 의자는 각 막에서 서로 다른 모양으로 조합되어, 고정된 무대 공간을 서로 다른 무늬로 조형하는 기능을 맡는다. 탁자가 놓이는 방향에 따라 1막은 하수 후면(upstage right)으로 향하는 무대가 되고(탁자들은 10~11시 방향 무대 공간을 점유한다), 언급한 대로 2막에서는 무대 중앙 전면(downstage right―downstage left)을 일직선으로 분리시키는 무대가 되며(탁자들은 5~7시 방향 무대 공간에 놓인다), 3막에서 상수 중앙(LC, left center)을 넓게 점유하거나, 4막에서는 무대 전/후 혹은 무대 좌/우를 길게 구획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주목할 점은 탁자가 무대를 장악하면(무대에 놓이면), 보통 탁자를 피해 동선이 구현되고 탁자이외의 공간을 주로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동선과 인물 배치법인데, 이 〈갈매기〉는 탁자가 점유한 공간을 적극적으로 장악하는 방식으로 인물 동선과 배치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탁자의 조형감은 무대의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분할하거나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들고, 그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인물의 동선에 탄력을 가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무대 1막은 하수 후면을 향한 동선이, 무대 4막은 좌/우로 나뉘어서 서로 마주보는 동선이 생성된다. 물론 무대 2막은 관객 앞에 일렬로 앉아 관객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선(시선)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동선 혹은 시선은 연희단거리패가 즐겨 애용하는 동선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색다른 모험이었다고 해야 한다.

 

2막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각자, 그 대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기다리는 것들이 영원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요원하다는 사실이다. 아르까지나가 기다리는 휴식(여름 휴가)은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매년 여름 휴식을 위해 이 고장을 찾는 그녀이지만, 막상 그녀가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짜증이거나 삶의 고달픈 문제일 따름이었다. 니나가 기다리는 것은 너무 막연해서 심지어는 그녀 자신조차 모르는 것이다. 니나가 뜨리고린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니나가 기다리는 뜨리고린은 ‘순진한 처녀’가 기다리는 파계와 일탈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더 가까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니나는 뜨리고린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무언가를 기다렸을 수 있으며, 그것은 막연하고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그녀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마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강렬하게 뜨레블레프를 원하지만, 그 감정 역시 충족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강력해지는 지도 모른다.

 

체홉의 인물들은 도착하고 만나는 순간부터 은근히 무언가로 타오르는 인물들인 경우가 많다. 〈바냐 아저씨〉의 바냐는 강렬한 충동과 후회로 살인이라도 저지를 기세이고, 〈세자매〉의 올가/마샤/이리나 역시 모스크바라는 강력한 이상향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진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기다리는 대상이 불투명하거나 모호하며, 심지어는 기다림 자체도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삶의 애매모호함을 담아, 그녀들은 (최선을 다해) 기다렸고, 그 이후에 도착한 ‘그들’도 함께 기다렸다. 순진한 처녀의 막연한 두려움처럼, 늙은 여배우의 노회한 처신처럼, 한 여자의 막연한 이끌림처럼, 막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일(一) 자 형 테이블은 그들의 언어를 가두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인물들은 기다림을 이야기해야 했고, 자리에 앉거나 주위를 서성여야 했다. 한 일(一) 자 테이블 뒤에 넓은 공간이 있음에도, 그 공간에 연연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테이블 위에 그(녀)들의 세상을 펴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주위에 서성거리다가 그녀 옆에 앉고자 했고, 어떤 여인은 강력한 라이벌 옆으로 다가가며 상대를 탐색하려고 했으며, 때로는 신경전을 펼치고, 한 편으로는 경계하기도 했다. 그래서 비록 대화는 테이블 범위에 갇혀 있었지만, 그 안에서는 상당히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할 수 있었고, 대화를 핑계로 자리를 옮기고, 끼어 앉고, 다가가고, 그래서 유혹하고, 때로는 멀리 앉는 작업이 가능해졌다. 이들의 자리 잡기 게임 같은 자리 배치는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그 자리 앉기 규칙 내에 그(녀)들이 상정하는 인간관계와 서사적 연관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테이블은 그(녀)들의 언어와 심리 그리고 관계와 맥락을 담은 일종의 그릇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그릇이 이루어놓은 장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밑바닥을 긁어내는 언어들 : 언어와 아이러니

 

엄마와 아들이 싸운다면, 어디까지 (연극적 표현이) 가능할까.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고 가시 돋친 말을 하고 심지어 폭력을 휘둘러도, 우리는 어떤 한계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현실 세계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 바탕을 둔 연극적 세계 내에서도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한계가 존재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특별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연희단거리패의 〈갈매기〉에서 이러한 통념은 크게 위협을 받았다. 아르까지나와 뜨레블레프는 이를 악물고 싸운다(3막). 도착/만남이 이 충돌을 예비하기 위한 사전 설정이었나 싶을 정도로 처절하게 이 모자는 부딪친다. 서로의 약점을 후벼 파고 상처 내기 좋은 말을 골라내기에 여념이 없다. ‘창녀’, ‘사기꾼’, ‘거지 자식’. 그들의 말싸움에는 끝이 없고 정도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상대를 죽일 듯 한 증오가, 서로를 사로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폭력마저 개입된다.

 

희한한 것은 그 증오와 매도가 끝나는 곳에서 그들이 모자 본연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점이다. 아니 그들 모자가 실제로는 어떠한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평온한 상태에 도달하는 지점이 이 충돌 직후이다. 떠남의 시간이 가까이 왔기 때문일 수도 있고, 충돌 자체가 발산해내는 카타르시스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자 그들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각자 자신에 대해, 서로에 대해, 상대의 약혼자(연인)에 대해―그러니까 엄마를 사이에 둔 경쟁자로서의 입장과, 애인을 사이에 둔 경쟁자로서의 입장―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르까지나는 뜨리고린을 낚아챔으로써 아들의 사랑을 지켜주려는 마음도, 아주 조금은 있었음을 시인한다. 아들 역시 연인의 라이벌로서 ‘엄마 애인’이 아니라 ‘엄마와 사랑’을 두고 다투는 경쟁자로서 뜨리고린을 의식하게 된다. 비록 다른 힘들에 밀려 그 감정을 일시적이고 미약하게 표현되지만, 그래서 이 감정은 진실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얕은 수준의 이해일지라도, 그러한 이해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 자체를 넓혀준다. 그렇게 그들은 싸움의 밑바닥에서 상대(아들로서, 혹은 어머니로서)에 게 한 걸음 다가갈 이유를 찾게 된다. 이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아이러니이다. 왜냐하면 싸움 뒤에 오는 것이 화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그 화해가 싸움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변화하는 색감들 : 인물과 심리

 

〈갈매기〉에서 ‘니나’는 변전(變轉)하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뜨레블레프를 사랑했다가, 곧 뜨리고린을 사랑하게 된다. 뜨리고린에게 버려지지만, 여전히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나의 말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에서 또 다른 사랑의 대상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니나가 사랑했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 그 사람은 자신이다.

 

만일 니나의 이러한 모습이 사실이라면, 뜨레블레프가 2막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4막에서 다시 자살을 감행하는 것과 대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뜨레블레프는 표면적으로는 자신보다 니나를 더 사랑하지만, 그래서 니나의 변화를 감지할 때마다 자살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니나는 뜨레블레프를 자살을 몰아갈 뻔한 자신의 무정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에 대한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뜨레블레프가 아닌 뜨리고린이, 그리고 뜨리고린을 넘어서는 곳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이 더욱 소중하기 때문이다.

 

〈갈매기〉에 담겨 있는 뜨리고린의 이야기 즉, 호수마을에 살고 있던 ‘갈매기’와 그 갈매기를 쏘아 죽이는 ‘사냥꾼’의 이야기는, 〈갈매기〉의 내적 삽화로 기능하면서 그 바깥을 감싸고도는 외형적 틀을 연극적으로 반영하고 뒷받침하는 구실을 한다. 이러한 삽화를 기계적으로 대입한다면, 갈매기는 니나이고, 갈매기를 쏘는 사냥꾼은 뜨리고린이 된다. 이렇게 내적 삽화를 이해한다면―사실 이러한 이해가 일반적이다―니나는 뜨리고린이라는 외적 대상에 의해 내적으로 파괴되는 순수한 자아―적어도 파괴되기 이전의 니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겹의 이야기를 더 상정할 수도 있다. 실제로 총을 쏘는 이는 뜨레블레프이고, 결국 그는 갈매기뿐만 아니라 자신도 쏘게 된다. 그러니 뜨레블레프가 갈매기일 수도 있다. 더구나 뜨레블레프는 실제 총에 맞아 죽게 되는데, 그 방아쇠를 당기도록 한 힘의 원천은 니나였다. 니나는 두 번의 떠남―뜨레블레프 앞에서 뜨리고린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며―을 통해 그 힘을 추동시켰다. 그렇다면 뜨레블레프와 니나의 관계에서, 갈매기는 뜨레블레프이고, 니나는 사냥꾼이 될 수 있다.

 

좋은 작품은 함축적 상징이 한 가지로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방아쇠의 비유는 뜨레블페프와 마샤 사이에도 성립될 수 있다. 마샤는 뜨레블레프에게 외면당한 여자로 전락하면서, 충동적으로 교사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의 결혼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심하기 이를 데 없으며, 그래서 뜨레블레프를 향한 마음을 여전히 간직할 수밖에 없게 된다. 뜨레블레프의 무심함이 그녀의 삶을 박제시켰음에도, 마샤는 뜨레블레프가 던져놓은 그물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식으로 인물들의 관계를 설정해 나가면, 〈갈매기〉의 인물들은 서로에게 박제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니나를 파멸시킨 뜨리고린은 반대로 아르까지나의 그물에 걸려 박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뜨리고린이 결정권을 지닌 듯 행동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심리의 이면에는 ‘아르까지나’에 포섭되어 떠날 수 없는 상태에 머무는 그가 분명 자리 잡고 있다. 그가 니나와 살았던 2년은 그 그물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자위책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의 이탈은 끝내 실패하고 아르까지나에게 돌아오고 만다.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하얀 코트를 두른 아르까지나 역시 한 없이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다. 그녀의 마음은 뜨리고린과 뜨레블레프 사이를 오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뜨리고린을 포섭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해도 엄습하는 불안감을 막을 수 없었다. 또한 아들 뜨레블레프를 어찌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는 크게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그 불안은 결국 뜨레블레프의 자살 소동과, 그 이후에 일어난 실제 불안으로 현실화되고 만다.

 

이러한 박제와 포섭의 문제에서 아르까지나가 다른 인물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그녀가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을 위한 선택을 최우선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녀는 아들보다 자신을 외면하고, 자신의 욕망을 쫓는 바람에 뜨리고린을 붙잡을 수 있었다. 니나를 아들의 연인보다는 뜨리고린의 연인으로 생각하면서도, 아들의 연인을 돌려준다는 명분을 앞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니나는 아들의 문제보다는 자신의 문제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관심사는 뜨리고린이었기 때문이다. 3막에서 이별 통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육체의 유혹은 그녀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수단을 불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여인과 놀랍도록 닮은 또 하나의 여인이 있다. 니나. 니나는 외부의 힘에 의해 타락하고 몰락한 여인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쟁취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여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소희 연출의 〈갈매기〉가 다른 〈갈매기〉와 다른 점이 여기에서 발견된다. 김소희는 니나가 순수한 존재에서 타락한 존재로 변화하는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고, 더구나 연민과 관조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피동적인 존재가 더욱 아니라고 단정하고 있다. 오히려 니나는 남을 파괴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까지, 자신을 지키는 능동적이고 약삭빠른 존재로 파악한 것 같다.

 

그녀의 변전은 다양한 색감의 옷으로 표현된다. 1막에서 그녀는 애벌레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이라기보다는 끈에 가까웠고, 벗은 상태는 아니지만 옷을 입기 전의 모습에 해당했다. 그러다가 2막에서는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난다. 1막이 옷을 입기 전이었다면 옷을 입게 된 것이고, 1막이 애벌레와 같은 상태였다면 탈피를 한 셈이다. 모르긴 몰라도 순백의 하얀 옷은 니나에게 가장 많이 입힌 의상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그녀는 갈매기의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2막의 하얀 옷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하얀 옷은 순백의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3막에서 착용된 도발적인 원피스, 즉 선홍색 때문이다. 니나는 떠나는 뜨리고린과 자신의 꿈 그리고 세상을 향한 도발과 성공에의 욕망을 붉은색 드레스로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이 색은 피의 색이고, 벌어진 꽃잎의 색이다. 여성의 몸과 성기를 상징하며, 강력한 유혹과 집착을 뜻한다. 이로 인해 전막(前幕)의 하얀색은 순백의 색이 아니라 요염 직전의 색, 그러니까 유혹의 붉은색을 피어 올리기 위한 도화지의 바탕색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서 맹아를 드러낸 욕망의 숲에서 붉은 도발을 길어 올려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 이전에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는 원초적인 몸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 색이 하얀색이었고, 드디어 하얀색은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그렇다면 4막, 즉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색은 무엇일까. 김소희는 그 색이 검은색, 혹은 낡은 색이라고 표현했다. 니나는 검은색 원피스에, 초라한 겉옷을 걸치고 들어왔다. 그녀의 색감은 짙게 숨어들어, 그녀의 지난 과거를 덮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로 인해 그녀의 인생 역시 ‘누드 톤’→기초의 ‘하얀색’→도발의 ‘다홍색’에 이어 어둠의 ‘검은색’이라는 기호를 띠게 된다. 이러한 기호 덕분에 니나는 마치 자신의 꿈을 잃고 추락했지만 현실의 떼를 누구보다 잘 경험한 한 인간의 인상을 닮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니나가 누군가에게 갈매기와 같은 신세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거꾸로 사냥꾼과 같은 신세라면, 니나는 4막에서 반드시 처참한 인생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녀가 이미 ‘그-뜨레블레프’를 떠났듯, ‘그-뜨리고린’을 떠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가 부엌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는 일군의 사람들에서 ‘뜨리고린’의 목소리를 분별하고 ‘그-뜨리고린’을 피해 황급히 떠나는 것은,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가 아니다. 그녀 말대로 여전히 ‘그-뜨리고린’을 사랑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녀는 이제 새로운 출발을 예비하고 있고, ‘그-뜨리고린’을 떠남으로써, 과거 ‘그-뜨레블레프’를 떠날 때처럼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백조를 꿈꾸는 새였다. 그래서 호숫가 작은 마을의 갈매기로 살 수 없었고, 피 묻어 박제된 갈매기로 전락한다고 해도, 자신이 모면할 수 없었던 ‘당시-떠나기 전’의 상황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텍스트에도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고 새어머니와 공존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명시해 놓고 있다. 물론 그는 ‘그-뜨레블레프’와도 공존할 수 없었다. ‘그-뜨레블레프’를 사랑했고 또 여전히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그-뜨레블레프’만으로는 자신의 세계를 포기할 수 없었다. 호숫가 마을을 넘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 진정한 백조가 되기 위해서 도전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뜨레블레프’를 떠나야 했다.

 

4막 직전, 즉 3막에서 4막으로 전환하는 시점에서―연희단거리패는 2년 여 시간을 빠른 걸음과 상대를 쫓는 행렬 그리고 스핀 무브를 연상시키는 춤으로 표현했다―다시 ‘그-뜨리고린’을 떠나야 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니나는 뜨레블레프를 떠나야 했듯, 뜨리고린에 속박되어서도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녀가 가장 사랑한 인물은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김소희 연출의 〈갈매기〉는 니나가 순진하고 연약한 여인이 아니라, 아르까지나처럼 자신을 철저히 사랑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자를 활용하는 인물이라고 해석했다. 눈물짓고, 후회하고, 말 속에 미안함을 숨긴다고 해도, 이러한 여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그녀는 때로는 옷을 벗고, 어떤 경우에는 순진함을 가장하고, 때로는 도발하고, 불리할 때에는 스스로 성정을 가라앉을 수도 있는 여인이었다. 니나의 무서움을 보았다면 과장일 수 있겠지만, 니나가 정상급 배우로 성장하고, 그 안에 남을 쥐고 펼 때 나타나는 원숙미와 노련함까지 갖춘다면, 그녀는 아마 아르까지나가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니나는 지금도 독하게 성장 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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