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녀/ 윤진현

 

이율배반의 세계와 꿈의 몰락

 

윤진현(연극평론가)

 

작 : 김우진

연출 : 박정희

단체 : 국립극단

공연일시 : 2015/05/12~05/31

공연장소 : 백성희장민호극장

관극일시 2015/05/28 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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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 텍스트의 즐거움

박정희 연출의 작품은 보기도 전에 좋다. 수산 김우진의 <이영녀>를 상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걱정이 앞섰다. 누가 <이영녀>라는 작품을 ‘재현’이 보여주는 강박을 넘어 그 심연을 제대로 보여줄까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출자가 박정희라는 소식을 듣고 한시름 놓은 채, 기꺼이 기다릴 수 있었다. 믿고 기다릴 수 있는 연출가란 그 자체로 기쁨 아닌가.

국립극단의 <이영녀>는 좋았다. 박정희답게 사실주의적인 희곡을 다양한 비사실주의적 기법 – 해설자, 극중극, 초현실적인 분절 등으로 긴장을 부여하여 극적 에너지를 극대화하였다. 사실 수산은 작품 속에서 시간을 특히 중요하게 사용하였다. ‘수분간 침묵’, ‘한참 있다가’, ‘고요히 있다가’, ‘정밀한 수분간’과 같은 성미 급한 관객이라면 지쳐 떨어지거나 지루해 죽을지도 모르는 지시를 태연하게 남발하였다. 물론 그의 희곡을 읽을 때에야 조금 침묵하나 보다 하면 그만이지만 연극 속에서 그 같은 소화하기 힘든 극적 지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만만치 않은 문제였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러한 지시를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무엇보다 박정희의 <이영녀>에서 영녀의 성격이 가난, 매춘 등으로 상투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것은 특히 좋았다. 이영녀를 억울한 일을 감수하지 않는 투쟁적인 성격으로 파악한 것은 득의의 해석이다. 드디어 김수산이 <이영녀>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시각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번 공연을 통해서 <이영녀>가 단순히 에피소딕한 구성으로 당대 하층민 혹은 여성의 삶을 재현한다는 표면적인 평가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작품이 공연된 지 이미 수개월이 지난 지금, 새삼 공연 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다. 또 하나는 김수산의 원작이 여전히 극적으로 미숙하다는 평가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희곡은 미숙하지만 연출이 세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영녀>가 완벽한 작품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단점, 약점, 그 미숙성이 극적 형식 때문인 것도 역시 아니다. 하여 <이영녀>가 극적으로 어떤 치밀함을 갖고 있는지 짚어야 했다.

김수산 희곡의 미숙성이란 화제가 나온 김에 먼저 그의 희곡의 약점을 지적해 두기로 하자. 그의 희곡은 극적 형식에서 미숙한 것이 아니라 언어적으로 미숙하다. 그는 그가 설명하고 싶은 것을 명백히 설명할 수 있을 만큼 한국어에 능하지 못했다. 조선말이 조선문학에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중요한 것은 누구나 이해시킬 수 있을 만큼 그의 조선어, 그의 문학어는 성숙하지 못했다. 요컨대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당대 언어환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예를 들면 관구네(이영녀)는 안숙이네의 인생관과 대차는 없으나 관구네는 ‘어떠한 방편’으로 생각하였고 안숙이네는 유일무이한 윤리적 주장으로 생각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떠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품 중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다. 도대체 그 ‘어떠한’은 무엇일까? 수산이 남겨준 질문이다.

당대 기층민의 언어를 듣고 옮겨적은 듯한 <이영녀>의 대사 또한 그렇다. 그 일상적 언어가 목적을 가진 극적 언어로 사용되려면 그 순간, 그 단어, 그 표현의 불가피성이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문학어는 여전히 모호한 대명사나 지시어로 핵심에서 미끄러져 버린다. ‘생명’, ‘삶의 의지’, ‘투쟁’과 같은 단어가 문학적으로 분명해지려면 이야기를 내포한 동적 사건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영녀’가 분노하고 투쟁하는 인물인 것인 맞지만 그녀의 투쟁은 구체적으로 재현되거나 보고되지 않는다. 이 불친절이 수산의 성격 때문인지 스타일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근대문학의 일원으로서 희곡에 요구되는 자질이 충족되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후학으로서 그 내용을 채워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보면 수산의 문학은 의미를 채워가는 재미가 살아있는 텍스트이다. 약점이지만 그 때문에 더 재미있을 수 있으니 그 즐거움을 감사하면서 다시금 박정희 연출의 <이영녀>에 기대어 수산의 생각을 더듬어 보자.

 

 

가혹한 이율배반의 세계와 언어 없는 하위자의 생성

 

여성의 삶이 원만하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상상하는가. 제일 쉬운 것은 착실한 신랑을 얻어 남편의 사랑과 존중을 받으며 알뜰살뜰 살림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든든한 직장을 구해 열심히 일하고 땀 흘리며 사는 것이다. 한 여성이 가정이 있는 데도 남편의 사랑이나 부양을 받기는커녕 삯일을 하고 매춘까지 해야 한다면 우리는 가장 비참한 삶의 하나라 할 것이다.

이 제도적 선입견 혹은 통념은 현재형이다. 여기에서 흔히 생략가능한 수의성분을 빼고 주요명사를 중심으로 다시 정리해보자. 결국 결혼, 직장, 매춘 세 단어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혼과 직장이 매춘보다 나은 단어로 사용되는 세상이다. 이 단어에 대한 사회적, 역사적 통념을 전제로 이영녀의 사건을 다시 보자.

이영녀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살기 위해 매춘을 했고 결국 밀매음으로 구류를 살게 된다. 그런데 이 여성을 안타깝게 생각한 경찰에서는 그녀를 공장에 취업하도록 해주고 공장주의 행랑에 거처까지 주선해 주었다. 안숙이네 집을 벗어나 매음의 유혹을 피하고 공장에서 번듯하게 일할 수 있다면 확실히 나아진 것 아닌가. 그러나 대부분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삶은 착실하게 일하는 남편을 얻어 그 그늘에서 사는 것이다. 잡기질에 빠져 집에 있는 쌀마저 퍼가던 남편이 죽고 이영녀는 새로이 노동자 남편을 얻었다. 남편이 착실하니 매춘 같은 것은 안해도 좋지 않은가. 확실히 나아진 것 아닌가.

그러나 정말 그런가? <이영녀>의 1막은 유달산 기슭의 빈민촌, 안숙이네 집이다. 영녀는 포주 안숙이네의 거간으로 만난 정가와의 매춘이 예상과 같지 않아 중간에 돌아온 상태이다. 안숙이네와 이영녀는 크게 다투지만 순사가 찾아와 밀매음으로 이들을 잡아간다. 2막은 강참사의 행랑이다. 밀매음에 종사하던 이영녀를 계도한다는 목표하에 목포경찰서는 이영녀에게 강참사의 행랑을 거처로 주선해주고 공장에서 일하도록 해주었지만 공장감독의 전횡으로 이영녀는 해고되어 돌아오고 강참사는 이영녀에게 성상납을 조건으로 복직을 허가한다. 이때 남편 청운이 죽었다는 소식이 도착한다. 3막은 이영녀와 유서방의 살림집, 차기일의 중매로 이영녀는 유서방과 재혼하여 살림을 시작했지만 결국 병들어 죽고 만다.

이것은 엄혹한 역설, 가혹한 이율배반의 연극이다. 아등바등 애쓸수록 그녀의 삶은 더 어렵고 힘든 것이었다. 현실적 가치, 사회적 통념과는 정반대이다.

이 같은 상황이 표현되는 핵심은 이영녀의 ‘말’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매춘을 강요받던 1막에서 이영녀는 목소리나마 크게 낼 수 있었다. 그러나 2막에서 3막으로 진전될수록 이영녀는 말을 잃고 조용해진다.

한 시절,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삶의 가치와 정의와 용기가 있던 시절을 기억하는 자라면 이영녀의 몰락을 이해할 것이다. 그녀가 점점더 조용해진 것이 무엇 때문인가는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을 지적하면 그녀는 일찍이 불법적인 밀매음 영역에서는 그래도 큰소리치며 싫은 것을 못한다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장에서 불법적인 폭력에 저항하자 해고되었고 결혼하여 남편이 생긴 뒤에는 더욱 학대 당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른다. 제도가 견고할수록 이영녀는 위축되고 그녀의 목소리는 작아진다.

그뿐인가. 조용해지는 것은 이영녀뿐이 아니다. 많은 관객이 작품이 끝나고 명순의 운명을 궁금해하면서 남은 명순에게 희망을 걸고 싶어했다. 생각해보면 1막에서 3막에 이르는 동안 지속적으로 무대 위에 위치하면서 확실한 성격발전을 보여준 유일한 인물이니 관객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명순이도 남자동생에게 한 치도 지지 않고 억울하고 불공평한 것을 참지 않던 성격에서 두려움을 알게 되고 어머니를 걱정하게 되었으니, 요컨대 두어 해 사이에 ‘철’이 푹 들었으니 명순이 확실히 성장하였으며 그것이 더 나아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제도가 이들을 입 없는 하위자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명백하지 않은가.

 

 

이영녀의 성격적 출발점, 윤주사인가, 남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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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에슬린, <<드라마의 해부>>(청하, 1987)에서

 

연극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았을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며 느꼈던 인식적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연극은 A에서 Z로 향해 간다. 그런데 그냥 직선이나 그냥 포물선이 아니라 B에서 C로 단기적인 목표 하에 갈등은 점진적으로 상승해간다. <이영녀> 또한 그렇다. 막이 오르기 전의 전사를 비롯하여 1막을 다시 짚어보자.

안숙이네는 포주로서 이영녀를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정가라는 인물을 고객으로 붙여 이영녀를 내보낸 상태이다. 안숙이네는 이영녀가 밤을 지내고 돌아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정가는 일종의 중간 거간으로 이영녀를 여러 남자에게 매춘하도록 하려 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이영녀가 일찍 돌아왔다. 안숙이네는 예상과 다른 사태가 벌어졌음을 직감한다. 어떻게 이영녀는 그렇게 일찍 돌아오게 된 것인가? 정가에게 받은 돈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안숙이네는 “그새 오는가?”라고 묻지만 바로 이어서 ‘어떻게 그렇게 일찍 돌아오게 되었느냐’고 묻기에는 적절치 않다. 이영녀는 집단적인 매춘에 동의하고 나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명순이와 관구의 싸움을 일러바치며 자식교육을 제대로 시키고 싶어하는 이영녀의 목표와 욕망으로 우회한다. ‘돈을 벌어야 가르치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이다. 안숙이네가 바라는 이영녀의 반응은 ‘아차, 돈을 벌어야 하는데, 내가 공연히 화를 내고 일을 망치고 돌아왔구나.’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영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영녀의 마음속은 어떨까? ‘그래 돈 벌어야지. 그러나 줄지어 들어오는 남자들을 상대해가면서까지 돈을 벌 수는 없어. 내가 뭐 돈 안 버나? 여기 있던 삯바느질 거리는 어디 갔어?’ 영녀의 속대답은 이쯤 될 것이다. 그래서 판실이네 집에서 맡긴 치마하고 두루마기는 찾아갔느냐고 묻는다. 1차 시기는 이영녀의 승리이다.

안숙이네는 속절없이 이영녀의 질문에 벌써 가져갔다는 대답을 하고 수분간 침묵한다. 그러다가 결국 정면으로 “어째 이렇게 일찍 왔는가? 사람은 만나 봤는가?”라고 묻는다. 영녀가 대답하지 않자 다시 후퇴, 관구를 돌본 공을 치사하듯 관구에게 해준 천사 이야기, 관구에게 들은 꿈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이영녀에게 답을 내놓게 할 것인가 생각한다. 마치 골문을 노리는 공격수가 공을 우회하면서 슈팅할 기회를 엿보는 것 같다.

이 극적 스릴이 강조되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안숙이네로 분한 남정미는 이 상황을 정말 멋지게 그려보였다. 능청스럽게 대답을 원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섬기는 노회한 늙은이, 진짜 그런 모습이리라. 단지 이 같은 긴장미 넘치는 김수산의 극작술이 좀더 적극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숙이네는 다시 공격한다. 이영녀는 소위 절개 굳고 정숙한 여염부녀는 아니다. 그녀에게는 남편 이외에 애인 윤주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남편 모르게 외간 남자와 정을 나눈 이영녀 자신의 처지를 꼬집는 전략이다. 그러나 윤주사는 이영녀에게 단순한 매춘의 대상이 아니라 처음으로 정든 사람,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윤주사가 이영녀와 좋게 헤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영녀는 그렇다고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영녀의 부정을 꼬집어 매춘을 정당화하려던 안숙이네의 공격은 다시 실패한다. 결국 안숙이네는 무조건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이영녀는 단호하다. 그런 일은 ‘사람이 당할 짓’이 못된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어떤 것일까? 근본은 서로 인간적으로 인정하고 인간답게 대접하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데 차별과 제한이 없는 것이다. 요컨대 아무 감정 없이 성관계를 맺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못되는 것이다. ‘이영녀’의 성격적 출발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 윤주사를 ‘남편’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 박정희의 <이영녀>에서는 윤주사가 등장하는 구절이 ‘남편’으로 각색되고 말았다. 단 한 단어의 각색이지만 그 파장은 크다. 어쩌면 이영녀가 남편 아닌 남자와 연애하고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사실, 이영녀라는 감정이입의 대상이 불가피한 성매매의 희생양이라고 보고 싶은 편협한 시각이 여전하기 때문은 아닌가.

윤주사가 남편으로 바뀌면 안숙이네의 공격 포인트는 여전히 돈이 필요한 상황, 이영녀의 현실로 보아 남편이 거금을 투기에 쓰고 서울에서 방탕한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질문은 생략하자. 이는 1차 공격에서 이미 사용한 이영녀가 돈이 필요한 상황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영녀 스틸

 

그러고 나면 결혼제도와 무관하게 자기감정과 사랑에 솔직한 이영녀의 본성은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제도 안에 안주하고 이영녀의 투쟁은 삶의 본질적 가치나 태도가 아니라 ‘뭇놈들이 번을 서서 들어오는’ 비인간적 매춘형태에 대한 반발에 그치게 되고 만다. 그리고 2막의 성상납, 3막의 결혼은 이영녀가 감내한 성격상의 모순행동이라기보다 1막의 매춘행동의 연장으로 간주된다.

다시 생각해보자.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그것을 제도, 사회적 질서는 꺾고 길들이려 하였다. 그 때문에 우리는 자괴감을 느끼고 좌절하며 절망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가치가 거부되고 짓밟히는 고통,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이 바로 이영녀의 고통과 몰락과 동격임을! 이영녀는 단지 한 여성이 아니라 꿈을 가졌으되 이루지 못하고 고통받은 모든 인간의 이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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