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홉의 단편은 이렇게 각색된다/ 최하은

십분의 미학: <체홉의 단편은 이렇게 각색된다>

 

최하은

 

작: 안톤 체홉

각색: 이윤택, 김소희, 오세혁, 정성훈

연출: 이윤택, 김소희, 오세혁, 정성훈

단체: 우리극연구소, 공연제작센터, 연희단거리패

공연일시: 2015.8.19.~8.30.

공연장소: 게릴라극장

관극일시: 2015.8.30.

 

연극을 좀 한다고, 또는 연극을 좀 본다고 하는 사람 치고 안톤 체홉의 이름이 낯설 이는 없다. 예술학교를 다녔다면 ‘갈매기’ ‘세 자매’ ‘바냐 아저씨’ ‘벚꽃동산’ 이상 체홉 4대 장막을 지긋지긋하게 읽었어야 했을 것이고 그 중 몇 작품은 공연해야만 했을 것이다. 잊을 만 하면 대형극장에서, 소극장에서, 원전에 충실하거나 혹은 각색되어, 정통파 혹은 새로운 체홉 희곡이 관객을 만나러 온다. 혹은 관객이 그의 거대한 명성에 이끌려 우르르 문전성시를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극장 안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형태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낳은 세기의 대문호 안톤 체홉과 스타니슬랍스키 연기 메소드의 교과서로 활용되는 그의 장막 희곡들을 우리는 우러러본다. 그러나 그러한 불멸의 대작들을 낳기 이전에 이 대문호는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잡지사에 꽁트와 재미있는 단편소설 등을 기고하는 소위 ‘생계형 작가’였다. 그는 한평생 이러한 짧은 소설을 육백여 편 썼다고 한다. 살아만 있어도 살기가 힘든 ‘먹고사니즘’의 시대에 대문호의 생계형 소설을 무대화하는 것은 그 착안부터가 이미 제법 극적이다.

 

극적인 것은 그뿐이 아니다. 짧게는 수천 자에서 길어야 수만 자에 이르지 않는 단편소설 일곱 편을 각색해 만들어진 일곱 편의 연극들은 각각 러닝타임이 십여 분가량이었다. 단막도 그냥 단막이 아닌 초단막이다. 클래식 음악으로 따지면 소품(小品), 판소리로 따지면 단가(短歌)다. 작품의 길이에 비해 연출의 면면이 과하다는 생각이 싫어도 절로 든다. 이윤택, 김소희, 오세혁, 정성훈 연출은 모두 저마다 이미 손꼽을 수 있는 대표작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의 스타일을 확립한 이들이다. 내공으로 따지면 라흐마니노프를 지휘하고 춘향가를 완창할 사람들인 셈이다. 이러한 연출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극장을 공유하며 만들어내는 초단막 옴니버스 공연이라니, 대단히 극적이다.

 

사실 10분 희곡, 10분 연극 등으로 불리는 초단막 희곡은 해외에서는 이미 하나의 연극 장르로 우뚝 서 있다. 한 시간, 두 시간, 혹은 그보다 더 긴 연극 공연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게 마치 꽁트 한 편을 보듯 가벼운 마음으로 보고 즐길 수 있는 초단막 공연은 새로운 관극 체험을 가능케 한다. 실제로 오세혁 연출이 대표로 있는 극단 걸판을 비롯한 많은 젊은 극단들에서는 각색과 창작을 통한 초단막 희곡 발굴과 공연화에 꾸준히 힘쓰고 있다. 본 체홉전과 때를 같이 하여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앤드씨어터를 주축으로 초단막 희곡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바바라 린제이를 초청한 ‘15분 연극제’가 개최되었으며, 그보다 조금 더 일찍 성북구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열린 ‘10분으로 충분한 연극제’에는 극단 걸판, 청년단, 여행자, 서울괴담 등 다양한 극단들이 번뜩이는 기지를 뽐내는 작품들을 줄줄이 내놓기도 했다. 어떤 정보든 빠르게 생성되고 또 그보다 더 빠르게 휘발되는 ‘인스턴트’ 시대의 조류에 부흥하면서도 장막을 만들 때만큼의 사유의 깊이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초단막 연극이 갖춰야 할 미덕일 것이다. 짧은 시간 속에 압축된 깊이는 송곳처럼 날카롭다. 연출의 면면이 결코 과한 것이 아닌 이유다.

 

인간에 대한 섬세하고 심도 있는, 날카로우면서도 애정 어린 분석과 묘사로 정평이 나 있는 체홉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실력파 연출들의 초단막 연극의 조합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실패를 예견하기 어렵다. 본 공연에서는 <재채기(원제: 관리의 죽음)> <드라마>를 오세혁 연출이, <베로치카> <혀를 잘못 놀린 사나이>를 정성훈 연출이, <철없는 아내> <사람 데리고 장난치지 마세요>를 이윤택 연출이, 마지막으로 <적>을 김소희 연출이 각각 맡아 만들었다.

 

<재채기>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체호프 단편선>에도 가장 먼저 실려 있는 단편인 <관리의 죽음>을 각색한 작품이다. 지위가 높은 장군의 머리에 대고 실수로 재채기를 해버린 후 그에게 사과하려고 안절부절못하던 하급관리가 장군에게 호통을 들은 후 갑작스럽게 죽는다는 이 이야기는 단편소설로서도 읽는 사람을 다소 어리둥절하게 하는 우연성과 즉흥성을 지닌 작품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인생의 웃지 못할 애환을 코미디로 치환해 표현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공연에서는 음악극 형태를 활용하여 다소 빈약하고 부조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원작의 플롯을 보강해 관객들의 시원한 웃음을 이끌어냈다.

 

<드라마>는 <재채기>와 마찬가지로 아주 사실적이고 흔한 상황 설정이 부조리하고 과장된 파국의 결말로 치닫는 형태를 띠고 있다. 저명한 작가의 집에 찾아온 한 눈치 없는 여자는 자신이 쓴 장막 희곡을 읽어주겠노라고 성화를 부린다. 작가는 그녀의 희곡 낭독을 읽으며 점점 인내심을 잃어가고, 마침내 장작(원작에서는 문진)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한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이러한 사건 혹은 인물 정서의 비약은 초단막 연극에서 몹시 효과적이다. 관객은 극중에서 구구절절 설명되지 않은 인물들의 심층심리에 대해 스스로 고찰해볼 여유를 갖게 된다. 저명한 작가라는 사회적 지위에 감추어진 인간 내면의 추악한 본성을 기어코 끌어내는 정당성을 여배우의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확보한 강렬한 작품이었다.

 

<베로치카>는 앞선 두 작품들과는 달리 파격적인 플롯보다는 풍경과 인물의 정서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일품인 단편이다. 한 시골 마을에서 연구를 위해 거주했던 젊은 학자는 마을을 떠나던 밤에 마을의 한 여자에게 고백을 받는다. 원래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던 학자였지만, 고백을 받자 그는 난처함에 그 고백을 거절한다. 여자가 마을로 돌아가고서야 남자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빈 무대에 최소한의 소품(나무등걸)만으로 숲의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하거나 원작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내레이터를 기용하는 등 연출의 다각적인 접근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원작 텍스트에 충실하게 만들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고 결과물도 체홉의 문학성을 충분히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완성되었다.

 

<혀를 잘못 놀린 사나이>는 <베로치카>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꽁트식 작품이다. 지참금을 가진 지주의 딸의 환심을 따내는 데 성공한 한 작가는 마침내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그러나 그녀가 청혼을 받아들였을 때, 작가는 ‘원칙을 뽐내고 싶었고, 우쭐대고 싶었고, 거만해지고 싶었’던 마음 탓에 혀를 잘못 놀리고 만다. 그녀에게 가난한 자신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지를 설파하고 그럼에도 자신을 선택하겠냐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그는 ‘그래도 당신을 사랑해요’ 같은 대답을 기대했겠지만, 여자는 그의 청산유수 같은 말에 설득되고 만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떠나가 버린 여자 뒤에서 남자는 후회한다. 일련의 과정이 적당한 슬랩스틱을 섞은 과장된 연기법이 작품의 톤에 꼭 들어맞아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또 폭주하는 대사들임에도 전달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남녀 배우의 합이 가장 잘 맞은 작품 중 하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선 네 작품이 비교적 ‘젊은 감각’의 체홉이었다면, <철없는 아내>부터는 우리가 알던 체홉에 보다 가까운 느낌이 든다. 젊고 아름다우며 사치 방탕하는 부도덕한 아내와, 그에게 부와 긍지를 모두 빼앗긴 나이든 남자가 있다. 남자는 우연한 계기로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어 아내에게 추궁한다. 아내는 처음에는 발뺌하려 하지만 전부 들통 났다는 걸 알고 오히려 뻔뻔한 태도로 일관한다. 남자는 아내에게 이혼을 선언하지만, 아내는 절대로 이혼을 해주지 않겠다고 버틴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대장치인 발 너머에서 연출된 불륜 장면이다. 흰 장갑을 낀 손 하나로 남녀 간의 사랑을 묘사하는 여배우의 표현력이 발군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사람 데리고 장난치지 마세요>였다. 입주 가정교사였던 여자에게 집주인 남자는 이런저런 얼토당토 없는 핑계를 대 가면서 월급을 삭감한다. 이런 식으로 자주 제대로 돈을 받지 못했던 여자는 포기하고 주어진 돈만을 들고 간다. 이때 남자는 여자를 비웃으며, 장난을 친 것뿐이라며 원래 약속했던 월급을 모두 준다. 여자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생각했을 때 이것을 이대로 받아 나갈 수는 없겠다는 것을 깨닫고, 남자가 말했던 이런저런 핑계들을 하나씩 따져가며 스스로 월급을 제하며 그 제해진 지폐들을 바닥에 뿌린다. 그리고 남자에게 그것을 다시 주워 가져와달라고 한다. 남자는 그저 장난을 쳤을 뿐인데 왜 이러냐고 구시렁거리며 그 지폐들을 주워 여자에게 가져다준다. 여자에게는 이제 애초에 받았어야 했던 만큼의 지폐다발을 들고, ‘이것은 내가 정당하게 받았어야 할 돈이지만 나는 이걸 받지 않겠다. 대신 이렇게 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그 돈으로 남자의 머리를 때리고, 후련하게 외친다. ‘사람 데리고 장난치지 마세요.’ 스토리에서 볼 수 있다시피, 이 극은 관객 모두가 바라고 기대하는 통쾌한 한 점을 향해 달려 나가고, 반드시 그 점을 종을 울리듯 꽝 때려주어야만 하는 구조였다. 그 마지막 종소리가 꽝 울렸을 때, 객석에서는 절로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한 탄성이 터졌다. 체홉이 언제나 천착했던, 그래서 그의 무수한 후학들이 마르크스비평으로 그의 작품을 분석하게끔 했던 노동과 인간성의 문제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어느 한 군데 흠잡을 곳 없이 깔끔했고 또한 쾌감이 있었다. ‘갑질’이라는 유행어가 히트를 칠 정도로 불합리, 부조리한 노사문화로 앓고 있는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카타르시스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 데리고 장난치지 마세요>가 우리 모두 예측할 수 있었던, 반드시 나와 주기를 바랐던 시원한 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작품이었다면 반대로 <적>은 도통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재미가 있었던 작품이었다. 아내가 위독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오는데, 그 의사는 아들이 죽은 슬픔에 빠져 있어 왕진을 거부한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도 의사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살려야 한다며 의사를 설득해 아내에게 왕진을 가게 한다. 함께 남자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집은 텅 비어 있다. 남자는 아내가 꾀병을 부려 남자로 하여금 집을 비우게 한 후 그녀 자신의 애인과 도망쳤음을 깨닫고 분노한다. 의사는 남자의 불행이 자신의 불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신을 왜 이곳으로 데려왔냐고 분노한다. 두 사람의 불행과 분노가 충돌하며 동지였던 둘은 ‘적’이 된다. 부조리할 정도로 자신들의 이야기만을 쏟아내는 독백조의 대사들과 기어이 몸싸움으로 이어지는 배우들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몹시 뇌리에 남았다. 또 한쪽 배우의 의상에 반대쪽 배우가 팔을 끼워 넣음으로서 한 옷 안에 몸이 들어간 이미지를 연출했는데, 서로를 위로할 수 없이 적이 된 두 사람이지만 사실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나타내준 효과적인 장면이었다.

 

일곱 편을 공연해서 일곱 편이 모두 수작이기란 쉽지 않지만 이 공연은 해냈다. 그 공은 체홉에도 있었고 연출들에도 있었지만, 당연히 배우들에게도 있었다. 공연 이야기를 할 때 의외로 자주 간과되는 것이 배우들인데, 본 공연에서는 많은 배우들이 두 역 이상을 맡으며 연기력을 뽐냈다. 특히 본 공연 일곱 작품 중 무려 네 작품에서 등장하는 홍민수 배우는 선역과 악역을 오가며 찰리 채플린을 연상케 할 정도로 깊이 있는 코미디 연기를 보여주었다. 또 황현아 배우의 노래와 속사포로 쏟아내는 독백 대사, 그리고 표정 연기가 과장되는 대목에서는 관객석에서 순수한 놀람의 탄성이 터지기도 했다. 연극은 결국 배우 예술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데, 언급한 배우들 외에도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쟁쟁한 기량을 뽐내는 배우들로 가득 들어찬 극장은 극장의 평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에너지 덕분에 좁고 후끈후끈하게 느껴졌다.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는, 관객의 호흡마저 쥐락펴락하는 명배우들을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충분(充分)을 대체하는 표현으로 십분(十分)이 있다. ‘십분 이해합니다.’ 형태로 많이 쓰이는 말이다. 10분 연극들로 이루어진 <체홉의 단편은 이렇게 각색된다>를 본 관객들은 어째서 ‘십분’이 ‘충분’의 의미가 되는지 ‘십분’ 이해할 것이다. 십분이면 충분했다. 십여 분 동안, 그러나 다 합쳐 두 시간에 달하는 공연 동안, 우리는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체홉을 만났다. 생계형 작가였던 체홉, 위대한 희곡 작가이기 이전에 육백여 편을 쓴 꾸준하고 성실한 작가였던 체홉, 그러나 그때에나 그 후에나 사람에 대한 무궁무진한 관심과 애정, 관찰과 성찰을 포기하지 않았던 체홉. 그렇기에 실로 위대한 작가였던 안톤 체홉. 마지막으로 프로그램북에 쓰인 한 연출의 말을 옮겨 적는다. ‘아마도 그 육백 편의 체홉이 네 편의 체홉을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네 편의 체홉으로 남기 위해 매일매일 머리를 쥐어짜며 썼을 육백 편의 체홉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때때로 나에게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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