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음악극 축제 오페라 <의정부 러브 스캔들>과 인천시립극단의 연극 <꿈 하늘>/ 박정기

의정부 음악극 축제 오페라 <의정부 러브 스캔들>과 인천시립극단의 연극 <꿈 하늘>

 

1, 제15회 의정부 음악극 축제 공식초청작 공연예술창작소 예술은 감자다의 가에타노 도니제티 원작 정선영 각색 연출의 오페라 <의정부 러브 스캔들>

의정부 예술의전당 소극장에서 공연예술창작소 예술은 감자다의 가에타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 원작, 송성철 편곡 지휘, 정선영 각색 연출의 <의정부 러브 스캔들>을 관람했다.

오페라 연출가 정선영은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성악과 및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오페라연출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마쳤다. 국립오페라단 상근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예술의전당 대학오페라페스티벌 이화여자대학교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서울소극장오페라페스티벌 <봄봄봄>과 <사랑의 묘약>1977’, 국립오페라단 <돈 조반니>, 서울시립오페라단 <열여섯번의안녕> <쟈코모와 여름-나비부인>, 서울시립소년소녀합창단 <왕자와 크리스마스>(2011-2012), 대구오페라축제 <투란도트> <운명의 힘> <봄봄> 2012 <카르멘>등을 연출하였다. 서울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세대학교에 출강하고, 현재 공연예술창작소 예술은감자다 대표이며 이화여자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페라 <의정부 러브 스캔들>은 가에타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L’Elisir d’amore)>을 한국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가에타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1797~1848)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그가 작곡한 많은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오페라는 로시니와 베르디를 연결하는 오페라의 발전에 다리를 놓았다. 작품들 중 특히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Lucia di Lammermoor〉(1835)·〈연대의 딸 La fille du régiment〉(1840)·〈라 파보리테 La favorite〉(1840) 등이 유명하다. 그의 오페라세리아 (:비극적 혹은 기타 진지한 주제에 의한 이탈리아 정통 오페라)에는 독특한 극적 중량감과 감정적 내용이 잘 표현되고 있으며, 희가극에서도 특유의 재치와 명랑함이 돋보인다.

최초의 성공작은 〈보르고냐의 엔리코 Enrico di Borgogna>이고, 2년 후〈사랑의 묘약 (L’elisir d’amore)〉으로 또한번 대성공을 거두었다. 로마니가 대본을 쓴 〈루크레차 보르자 Lucrezia Borgia〉(1833)가 또다시 성공하면서 밀라노의 라 스칼라 가극장 등 이탈리아 여러 곳에서 명성을 굳혔다. 파리에서 공연한 〈마리노 팔리에로 Marino Faliero〉〈청교도 I Puritani〉 이후 그는 뛰어난 비극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1835)를 작곡하기 위해 나폴리로 돌아갔다. 1838년〈폴리우토 Poliuto〉를 작곡했으나, 공연이 금지되자 빅토르 위고의 희곡에 바탕을 둔 오페라 〈루크레차 보르자>를 작곡했는데 역시 위고의 반대로 무산되니, 도니제티는 파리로 다시 가서〈폴리우토>를 외젠 스크리브의 프랑스 대본으로 〈순교자 Les Martyrs〉라는 제목으로 바꿔 공연했다. 이보다 2개월 앞서 작곡한 오페라 코미크 〈연대의 딸〉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고, 이로 인해 도니체티의 첫 그랑 오페라 〈라 파보리테〉가 탄생되었다. 이후 <마리아 파디야 Maria Padilla〉〈샤모니의 린다 Linda di Chamounix〉(1842)가 공연되었고, 같은 해 희가극 〈돈 파스콸레 Don Pasquale>를 발표 공연했다.

무대는 19세기의 스페인 바스크 마을을 21세기 한국 의정부의 한 마을로 설정을 했다. 배경 막에 의정부 한 마을의 전경이 펼쳐지고 동네 입구에 커다란 고목이 자리를 잡았다. 무대 하수 쪽에 블록담장 안으로 슬레트 지붕을 얹은 주택의 일각이 보이고, 블록담장이 둘러져 있다. 넝쿨식물이 잘 자라 담장을 덮고 있는데 바로 주인공 청년의 집이다. 담장 밖으로 전봇대가 서있다. 전깃줄이 집 너머 다음 전봇대로 연결된 것이 보인다. 집 밖 전봇대 앞에는 조형물이지만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상수 쪽에는 작은 가게가 있고, 주인공 처녀의 상점이다. 가게에는 간판이 달려있고, 가게 앞마당에는 평상을 놓아 마을사람들의 쉼터가 된다. 마당 한가운데에 커다란 나무가 있고, 흰 구름 형태의 조형물이 달려있어 거기에 출연자들이 부르는 이태리어 노래가 한글자막으로 투사된다. 연극에서는 주인공은 스페인 인명을 그대로 사용을 하고, 그 외 출연자들은 직업이나, 한국식 이름으로 바꿔 사용한다. 무대 전면 오페라 박스에 연주석을 마련하고, 건반악기, 현악기, 금관악기 타악 연주자들이 지휘자와 함께 자리를 잡는다.

오페라는 도입에 의정부 러브스캔들을 취재하는 기자 한 명이 등장해 여기 저기 촬영을 하다, 개의 으르렁 소리에 깜짝 놀라는 모습이 관객의 폭소를 유발시킨다. 잠시 후 들일을 하던 농부들과 여자들이 등장하고, 그 중에는 꼬부랑 할머니의 모습도 보인다. 그들은 등장해 즐겁게 합창을 한다. 가게 앞에서는 여주인공 아디나가 책을 읽고 있다.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남주인공 네모리노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노래를 부른다. 아리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이 얼마나 귀여운가 (Quanto e bella, quanto e cara)>. 아디나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자, 글자를 읽지 못하는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재미있다면 좀 읽어 달라고 청한다. 아디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and Isolde)읽어 준다. 그리고 그 책에 나오는 사랑의 묘약을 노래한다. 그때 헬리콥터의 도착 음이 들려오고, 흰 연기 속에 남아대장부다운 모습의 박 중사가 부하 2인과 함께 등장한다. 박중사는 마을 아가씨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디나에게 눈길을 보내면서, 유혹의 아리아 <옛날 파리스가 한 것처럼 (Come Paride vezzoso)>을 부른다. 약간 마음이 이끌리는 듯한, 아디나에게 박 중사는 품에서 작은 보석 상자를 꺼내들고, 머리장식 핀을 주며 청혼을 한다. 그녀는 긍정적인 표정을 짓는다. 박 중사는 병사들을 데리고 농장에 쉬러 간다. 마을 사람들도 일을 나가고 광장에는 네모리노와 아디나만 남아있다. 실은 아디나는 네모리노를 좋아하고, 네모리노에게 적극적인 사랑을 기대하지만, 소심하고 내성적인 네모리노의 태도에 불만을 품게 된다. 느닷없이 북 치고 장구 치는 소리가 나더니 나타난 것은 약장수 도사 둘까마라다, 손수레에 온갖 약을 싣고 등장해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엉터리 약을 팔기 시작한다. 아리아 <자 들어보세요, 여러분 (Udite, udite o rustici)>. 약장수 도사가 약을 팔면서 만병통치약이라 떠드니, 마을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약병을 한 개씩 거머쥐고 퇴장한다. 그때 네모리노가 다가와서 그에게 이졸데 공주의 사랑의 미약을 갖고 있느냐고 묻는다. 약장수 도사는 술 한 병을 ‘사랑의 묘약’이라면서 팔고는 하루가 지나야 효력이 나타난다고 덧붙여 말한다. 이 약을 마신 네모리노는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때 아디나가 등장하자, 네모리노는 그녀를 보면서도 전처럼 황홀한 듯 쳐다보지 않고 외면한다. 아디나는 그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마침 그때 박 중사가 나타나고 그녀는 네모리노를 떠보려고 박 중사와 결혼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한다. 그러나 네모리노는 사랑의 묘약의 효력으로, 내일이면 그녀가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으로 믿기에 의연한 태도를 보인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아디나는 결국 박 중사와 오늘 중으로 결혼을 하겠다며 박중사와 함께 퇴장한다. 네모리노로서는 약 효과가 내일에야 발생을 하니 아디나의 거동을 보기만 할 뿐 어쩌지를 못한다. 그때 약장수 도사 둘까마라가 등장하고, 네모리노는 약 한 병을 더 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돈이 없어 약값을 계산할 수 없다고 하자, 도사는 네모리노에게 군 입대를 하라고 권한다. 입대를 하면 거액의 현금을 나라에서 줄 뿐 아니라, 안정된 직업이 된다고 부추긴다. 네모리노는 사랑의 묘약을 사기위해 입대하기로 결심을 한다. 아디나와 박 중사의 결혼식 때문에 공증인이 결혼증서를 만들어 가지고 등장하니, 아디나는 오늘 밤까지 서명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때 박 중사에게 급히 귀대하라는 전갈이 온다. 그러자 네모리노가 다가와 입대를 원하니, 박 중사는 사랑의 경쟁자를 입대시키는 것에 만족스런 웃음을 터뜨리고, 약장수 도사 둘까마라도 많은 돈을 수중에 넣게 되니 희색이 만연하다. 장면이 바뀌면, 마을 아가씨들이 네모리노의 이모부가 돌아가시어 그에게 막대한 유산이 돌아오게 되었다고 수근 거린다. 그리고 나타난 네모리노에게 마을 아가씨들이 다가가 호감을 보이며 둘러싸니, 네모리노는 약이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네모리노가 아가씨들과 함께 퇴장하자, 약장수 도사 둘까마라는 네모리노가 ‘사랑의 묘약’을 사기 위해 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했다고 아디나에게 말한다. 아디나는 비로소 네모리노가 자기를 열렬히 사랑하기에 죽기를 각오하고 입대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기회를 놓칠세라 둘까마라는 그녀에게도 ‘사랑의 묘약’을 팔려 하지만, 아디나는 사랑을 자신의 힘으로 쟁취하겠다며 약장수 도사의 제의를 거절한다. 약장수 도사와 아디나가 퇴장하자 시종일관 이 광경을 지켜보던 네모리노는 사랑하는 아디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고, 명 아리아 <남 몰래 흘리는 눈물 (Una Furtiva Lagrima)>을 열창한다. 이때 아디나가 나타나 네모리노의 입대 계약서를 돈과 함께 되돌려 주고 이곳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아리아 <이것을 받으세요 (Prend)i>을 부르며. 그러나 아디나는 그를 사랑 하고 있다는 말을 자기 입으로는 꺼내지 않는다. 네모리노는 사랑 받지 못한다면 군인이 되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한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아디나는 가슴속의 사랑을 털어놓는다. 박 중사가 오자 아디나는 네모리노를 남편으로 삼겠다고 선언하며 네모리노를 끌어안는다. 네모리노도 아디나를 꼬옥 껴안는다. 이 광경을 보고 박 중사는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고 다른 처녀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대단원에서 약장수 도사 둘까마라가 손수레를 끌고 등장해 관객을 향해, 사랑의 묘약을 사라며 속삭이듯 노래를 부르고, 마을사람들이 관객에게 손을 흔드는 장면에서 오페라 <의정부 러브 스캔들>은 마무리를 한다.

정능화, 허진아, 유진호, 한진만, 김혜정, 이윤지, 박금현, 최경민, 백예나, 김혜란, 인도연, 이화진, 방현민, 성기현, 김상민, 장형주, 김다운, 김익환 등 출연자 전원의 호연과 열창은 수준급 조화를 이루어 퍼포밍 아츠 컴퍼니 예술은감자다의 발전적 장래를 예측하기에 충분해 관객의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는다.

지휘 송성철, 피아노·음악코치, 김성희, 바리올린 신서늬, 첼로 조은영, 클라리넷 장영광, 타악 이상인 등의 연주자들의 기량 역시 오페라 분위기 상승의 결정적 역할을 해, 관객을 감상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무대디자인 김현정, 조명디자인 김희선, 의상디자인 김은지, 분장디자인 구유진, 자막제작 정선영, 무대감독 조희은, 무대제작 처음무대, 조명감독 한상웅, 조명 김두리 이주혁 전세롬 서주희, 분장 SF Make up 김지주 팀장, 서영지 추미라, 자막진행 홍진선, 조명장비 (주)칠삼컴퍼니, 영상장비 Visual K, 기획·조연출 신희수, 진행 이윤지 등 스태프 진의 열정과 노력과 기량이 조화를 이루어, 제15회 의정부 음악극 축제 공식 초청작, 퍼포밍 아츠 컴퍼니 예술은 감자다의 가에타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 작곡, 송성철 편곡·지휘, 정선영 연출의 <의정부 러브 스캔들>을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친 대중적인 걸작 오페라로 탄생시켰다.
5월 22일 박정기(朴精機)

 

2, 인천시립극단의 차범석 작 김석만 연출의 <꿈 하늘>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인천시립극단의 차범석 작, 김석만 연출의 <꿈 하늘>을 관람했다.

차범석(1924~2006) 선생전남 목포 출신의 극작가이자 연출가다.

한국적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한 대표적인 인물로 대한민국예술원장과 한국문예진흥원장을 역임한 문화행정가이도 했다.

식민치하, 한국전쟁, 해방을 겪은 전후문학세대지만 전쟁이라는 주제에 그치지 않고 사회문제를 직시하며 풍자와 비판의식이 강한 작품을 발표했다. 또한 기계문명화 되는 사회적 변화와 시대적 상황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작품에 표현해내고 있다. 한 방송국의 20년 장수드라마였던 ‘전원일기’의 집필자로도 유명하다.

1924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한 차범석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밀주(1955)’ ‘귀향(1956)’이 입선되면서 본격적인 극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차범석은 유치진의 영향으로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로 표현한 희곡들을 창작한다. 차범석의 작품 활동 시기는 크게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1956년 등단 후 ‘제작극회’를 결성해 활동한 제 1기는 ‘작가의식의 형성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의 작품으로는 농어촌의 무지한 사람들의 삶을 그린 ‘밀주’ ‘귀향’, 한국전쟁 동안 빨치산 활동으로 유명한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산불’, 전쟁 후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며 발생한 인간소외 문제를 다룬‘계산기’ ‘사등차’ ‘분수’, 신·구세대간의 갈들을 그린 ‘불모지’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등이 있다.

2기는 1963년 극단‘산하’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시기로 ‘극작술의 정립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의식이 사회 비판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로 변화하며 상업성을 띤 애정물과 역사극을 쓰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이념에 희생당하는 민중의 모습을 그린 ‘학살의 숲’, 신구세대 갈등을 다룬 ‘대리인’‘청기와집’, 애정문제를 쓴 ‘장미의 성’ ‘환상여행’, 역사적인 내용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 ‘손탁 호텔’등이 있다.

3기는 1983년 극단 ‘산하’ 해체 후부터 2006년까지. 후진 양성에 힘쓰며 문화행정가, 극작가로서 희곡은 물론 무용극, 악극, 오페라 대본 집필과 함께 역사극 창작에 힘썼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선각자들의 삶을 다룬 ‘식민지의 아침’‘통곡의 땅’, 남성 권위가 약화되는 모습을 그린 ‘바람 분다. 문 열어라’, 목포에 살던 실존 여성의 이야기를 쓴 ‘옥단어’등이 있다.

한편, 목포문학관에는 ‘차범석관’이 마련돼 문학사에 남긴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한국연극계에서는 그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차범석 연극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김석만 (1961~)은 6·25 사변 중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을 다니면서 연극반 활동을 하고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와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극과 공연 학을 전공했다. 연우무대를 중심으로 창작극 연출에 몰두해 <한씨연대기>, <변방에 우짖는 새>,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각색에 참여하고 연출했다. 중앙대학교 연극학과를 거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연기, 연출을 가르쳤다. 가극 <금강>으로 2005년 평양 초청 공연을 다녀왔다. 최근에는 전통의 현재화 작업에 주목해 <영원한 사랑 춘향이>, <세종, 하늘의 소리를 듣다>(세종조 회례연), 정가극 <이생규장전> 등을 연출하고, 이진순 선생 기념사업회의 연극 <현자 나탄>도 연출했다.

[연기의 첫걸음],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폴롯], [통쾌한 희곡의 분석], [연출가처럼 생각하기] 등의 역서와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극론], [연기의 세계],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출] 등의 저서를 냈다.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은 한말 일제시대에 역사가, 언론인,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으며 26세가 되던 해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황성신문 기자가 되었다. 1905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그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을 써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였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4월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톡에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임통치에 반대하였다. 1923년 의열단의 이념과 운동방향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은 항일민족 운동사상 가장 강건하고 웅장하면서 정교하게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향을 제시한 문서로 손꼽힌다. 선생은 1928년 대만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했다.

연극은 도입에 여순 감옥에서 병사한 신채호 선생의 시신 앞에 선 부인 박자혜 여사의 애통해 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극은 과거로 되돌아가 선생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모습이 장면 장면마다 그려지고 대단원은 연극의 도입과 같은 장면으로 마무리가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치욕을 딛고 역사 속 민족의 우수성을 일깨우고자 했던 단재 신채호의 선생의 일갈이다. 그는 민족계몽에 앞장섰던 역사학자이자 철학가, 언론인, 그리고 독립 운동가였다. 일본의 농간에 흔들리던 역사를 철저히 고증해 한민족의 자주성을 증명해 냈으며 날카로운 필봉으로 애국 계몽운동을 독려, 위태로운 조국을 위해 자주독립과 국권수호 의지를 이끌었다. 한평생 일본에 고개 숙이지 않겠다며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세수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민족의 암흑기, 일본의 핍박으로 위축된 우리 민족에게 자긍심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그의 업적은 지금까지 역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업적이 가족들의, 특히 아내 박자혜(1895~1943) 여사의 처절한 헌신에 기반하고 있음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위대한 인물의 곁에는 한 결 같이 든든한 지원군이 있기 마련인데, 신채호 선생의 경우 박자혜 여사가 바로 그랬다. 그녀는 가정에 무관심한 남편을 대신해 한평생 홀로 아이들의 양육과 생계를 책임졌고, 극심한 생활고에도 남편의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을 맺은 것은 1920년 북경에서였다. 당시 신채호 선생은 39세의 이혼남이었고 박 여사는 24세였다. 적지 않은 나이차에 조건과 상황, 무엇 하나 맞는 구석이 없었던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바로 조국 독립을 향한 한결같은 열망이었다.
신채호 선생은 당시 날카로운 필봉으로 이름 날리던 독립 운동가였고, 박자혜 여사는 북경에서 연경대학 의예과를 다니던 인재였다. 두 사람 모두 조국을 위해 활동하다 조국을 떠나 도피길에 올라야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학문과 독립 이외엔 관심 없기로 유명한 신채호 선생의 무심함도 박 여사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녀의 독특한 이력과 총명함, 당찬 눈빛이 그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던 것이다.
박자혜 여사는 시대적 흐름의 중심에서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온 여인이었다. 어린 시절 조선왕실에 보내져 궁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한번 궁녀는 영원한 궁녀로 살아야 하는 것이 모든 궁녀의 숙명이었지만, 몰락한 왕실은 이례적으로 100여명의 궁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녀도 그 중 한명이었다. 어리고 총명했던 그녀는 운 좋게 고종의 처 황 귀비 엄 씨가 후원하던 숙명여학교에 입학해 신식교육을 받았고, 조산부양성소를 거쳐 간호사로 일할 수 있었다. 그녀는 졸업 후 조선 총독부의원에 취직했고, 일본이 주는 봉급을 받으며 민족의 독립에는 별 관심 없는 삶을 살았다.
그녀가 시대의 소용돌이에 다시 정면으로 부딪친 것은 1919년 3.1운동이었다. 당시 일본 경찰들은 독립을 부르짖는 군중들을 총칼로 학살하다시피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어갔다.
서울시내 모든 병원이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피비린내와 신음소리가 응급실을 가득 메웠다. 그녀가 일하던 총독부의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어가는 이들을 살려놓으면 경찰들이 들이닥쳐 어디론가 끌고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내면에서 충격을 넘어선 분노가 치솟았다.
“왜 이들은 목숨을 내던지며 조국의 독립을 외치는가. 왜 일본은 이토록 무자비하게 그들의 외침을 묵살하는가.”
생계를 위해 억눌렀던 애국심이 울분과 함께 터져 나왔다. 박 여사는 그 길로 만세운동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총독부의원에서 일하던 한국인 간호사들을 소집해 ‘간우회’를 조직했다. 당시 총독부의원 의사·간호사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조선인은 의사 4~5명과 박자혜 여사를 포함한 간호사 열명 남짓, 이 중 4명의 조선인 간호사가 동참의사를 밝혔다. 독립을 외칠 결전의 날은 3월10일로 정해졌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0일이 되기도 전에 정보가 새나갔다. 거사는 무산됐고 박자혜 여사를 비롯한 간호사들은 일경에 체포돼 유치소에 수감됐다. 총독부의원장의 보증으로 풀려났지만 그녀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일본 경찰들은 그녀를 과격분자로 점찍고 감시망을 조여 왔으며, 그녀 스스로도 더 이상 일본을 위해 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피하듯 북경으로 왔다.

신채호 선생은 상처받은 박자혜 여사에게 굳건한 의지처가 되어 줬다. 조국과 민족,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은 그녀의 번뇌를 맑히는 감로수였다. 두 사람은 사상과 이념을 공유하며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갔다. 결혼과 동시에 여관방에서 조촐한 신혼살림을 차렸고 1년 만에 첫아들 수범을 낳았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민족의 미래를 짊어진 이들에게 사랑은 사치에 불과했을까. 두 사람은 결혼 2년만에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상황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불가피한 이별을 맞게 된다. 신채호 선생은 머리를 깎고 북경 관음사에 몸을 의탁했고, 박자혜 여사는 큰아들 수범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와 인사동 어귀에 산파소를 차렸다.
여자 홀로 아이를 키우는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욱이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던 까닭에, 박 여사의 산파소는 손님보다 일본 경찰의 방문이 더 잦았다. 1923년 신채호 선생이 조선의열단에 가담해 ‘조선혁명선언’을 발표, 무장투쟁을 선언하면서 일본 경찰들의 감시와 폭력은 더욱 심해졌다. 첫째 아들 신수범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그는 빚을 내 학교를 다녔는데 등하교 길에 일본경찰들이 불러 세워 가방을 뒤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손님은 열 달에 한명 받기도 어려웠고 가족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끼니를 때우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1928년 12월12~13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신채호 부인 방문기’가 당시 상황을 소상히 전한다. 이 기사는 신채호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국제위폐 사건으로 체포된 직후에 보도됐다.
“홀로 어린아이 형제를 거느리고 저주된 운명에서 하염없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애처로운 젊은 부인이 있다. 인사동 19번지 거리 ‘산파 박자혜’라고 쓴 낡은 간판이 주인의 가긍함을 말하는 듯 음산한 기운을 지어내니, 이 집이 조선사람으로서는 거의 다 아는 풍운아 신채호의 가정이다.(…)삼순구식도 계속할 힘이 없어 어찌할 바 모르고 옥중에 있는 가장에게 하소연하니 ‘정 할 수 없으면 고아원으로 보내라’는 편지를 받고 복 받치는 설움을 억제할 길 없었다.”
기사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처절한 생활고로 점철돼 있었다. 솜 두툼히 넣은 옷 한 벌 보내달라는 남편의 부탁에 재료살 돈이 없어 애간장을 태웠고, 좁은 방 한칸 6원50전에 불과한 월세를 낼 엄두도 내지 못 한 채 야위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기 일쑤였다.
무심한 남편을 원망할 법도 하건만,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물심양면 남편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저술에 필요한 책을 요청해 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구해 보냈고 어려운 살림에 끼니를 굶는 한이 있더라도 활동비를 댔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산파소를 운영하며 독립 운동의 중심에 서있었다. 남편과의 지속적인 편지 교류를 기반으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간 정보와 물건 등을 전달하는 연락책을 담당했으며, 때때로 위험에 직면한 독립투사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1926년 나석주 의사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할 때, 목숨을 걸고 위치 안내와 숙식 제공 등 제반 사항을 도왔던 이도 박 여사였다. 이러한 그녀의 활동은 오랜 세월 남편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가, 199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인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한 평생 조국을 위해, 또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박자혜 여사의 삶은 마지막까지도 고되고 힘겨웠다. 남편과의 사랑도 가슴 아픈 비극으로 끝났다.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은 1936년 남편이 수감된 감옥에서다. “신채호 뇌일혈로 의식불명 생명위독.” 여순 고아동형무소에서 찾아든 비보는 충격 그 자체였다. 박 여사는 황망한 심정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형무소로 향했다. 그러나 10년 만에 마주한 남편은 가족들이 곁에 온 줄도 모른 채 미동이 없었다. 그것이 남편의 마지막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이틀 만에 옥중에서 세연을 접는다.
“여보, 당신이 남겨놓고 가신 비참한 잔뼈 몇 개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불쌍한 당신의 혼이나마 부처님 품속에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이 밤이 밝아오면 아이들을 데리고 동대문 밖 지장암에 가서 정성껏 기도하겠습니다.”
박자혜 여사가 단재의 영전에 바친 추모 글 ‘곡하는 마음으로’의 일부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 이후 “모든 희망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할 정도로 상심했다. 당시 일간지에 남편의 유골함을 받아든 박자혜 여사의 모습이 실렸는데, 작은 흑백사진으로도 그 애끓은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다. 남편의 죽음 이후 박자혜 여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둘째 아들 두범이 1942년 영양실조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로 유추하건데, 여전히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렸음이 분명하다.
아들을 떠나보낸 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박자혜 여사는 좁은 단칸방에 홀로 누워 숨을 거뒀다. 조국의 독립을 불과 2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남편을 바쳤고 또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그랬기에 그 삶은 더욱 고되고 외롭고 처절했다. 민족의 고통을 외면했다면 적어도 육신만은 좀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외롭고 고단했던 삶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후회했을까 아니면 홀가분했을까. 어쩌면 남편의 영정에 바친 추모글처럼, 삶의 모든 기억들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품에서 영면에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독립운동가의 아내이자 동시에 독립운동가였던 박자혜 여사. 그녀의 처절한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재가 존재함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위의 글은 필자가 수집한 자료다. 희곡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기에 기왕에 단재 선생의 일대기라면 반드시 첨가되어야 할 부분이기에 소개한 것이다.

심영민, 김태훈, 이규호 3인의 연기자가 단채 신채호 선생의 역을 연령별로 연기한다. 박자혜 여사로 강주희, 나석주 열사로 서창희, 박은식 사학자로 차광영, 장지연 의사로 김세정, 조 씨 역으로 정순미, 이회영 선생으로 서국현, 양기탁 열사로 이범우, 안창호 선생으로 김현준, 그리고 최진영, 권순정, 송주희, 황혜원, 이신애, 아수정, 김문정, 김희원, 함준규, 김성현, 김위광, 이상호, 이태훈, 함진석 등 출연자 전원의 호연과 열연은 관객의 우레와 같은 갈채를 이끌어 낸다.

작곡 황호준, 안무 박무영, 무술지도 이정훈, 무대 임건수, 조명 영상 신재희, 음향 김현산, 의상 정경희, 소품 서정인, 분장 손진숙, 사진 유재형, 일본어 지도 쯔카구치 토모, 홍보디자인 김미연, 헤어 빅토리아, 무대감독 용선중, 조연출 손경희, 훈련장 이완희, 단무장 김화산, 행정 이옥희, 기획 이돈형, 홍보 박선영, 조명 영상 보 조희란, 영상오퍼 현종찬 조예본 손지원, 영상소스제작 김기봉 남윤아, 조안무 김선영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노력과 기량이 합하여, 인천시립극단의 차범석 작, 김석만 연출의 <꿈 하늘>을 성공적인 공연으로 만들어 냈다.
5월 29일 박정기(朴精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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