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사발렌티나/ 오유경

김수로프로젝트18탄 <까사발렌티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이른 담론? 하지만 분명 의미 있는 용감한 시도.

 

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오유경

 

 

작: 하비 피어스타인(Harvey Fierstein)

번역: 김준영/이민정

윤색/연출: 성종완

주최/제작: 아시아브릿지컨텐츠(주)

공연일시: 2016/06/21-09/11

공연장소: 대명문화공장2관 라이프웨이홀

관극일시: 2016/06/24

 

 

글을 전개하기 전 먼저 고백해야겠다. 하나는 가지고 있던 편견에 대한 반성이요, 다른 하나는 할 수 없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혼란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코믹한 소재로 가벼운 대중성에만 집중한다고 여겨지는 흔히 말하는 상업연극(?)에서 진지한 연극무대를 만났다는 의외성이 가져온 반성이요, 다른 하나는 그 상업연극이 다룬 소재와 주제가 매우 진지하고, 지금도 끊임없이 다양한 관점들로 토론되는 현재진행형의 사회적 담론이기에, 스스로 공부부족, 경험부족, 사고부족, 논리부족, 개념부족을 혼란 속에서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충분한 이유를 던져 준 하비 피어스타인(Harvey Fierstein)作, 성종완 연출의 작품 <까사발렌티나>! 만나서 반가왔다!

 

작품 <까사발렌티나>는 1960년대 미국 뉴욕 캣츠킬(Catskill)을 배경으로 ‘여장을 좋아하는 남자들’, 일명 크로스 드레서(cross dresser:CD)들의 자아정체성의 갈등을 그렸다. 그들은 ‘신여성회’라는 정식조직을 만들어 공개적인 사회적 인정을 받고자 노력하는데, 그 과정 안에서 그들도 각자의 이유로 서로 갈등하며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공부가 필요하다. 크로스 드레서란 무엇인지, 그 개념이 우리가 요즘 흔히 접하는 트랜스섹슈얼(trans sexual), 트랜스젠더(trans gender)나 게이(gay) 혹은 드래그퀸(drag queen)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말이다. 다른 개념은 그만두고. ‘크로스 드레서’는 자신이 자신과 반대되는 성(sex)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트랜스젠더, 혹은 자신과 같은 성적 정체성을 가진 대상을 사랑하는 게이와 다르게, 자신의 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생활하면서도 자신과 반대되는 성의 복장과 행위(gesture)를 하는 걸 즐기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 안에 숨겨진 반대되는 성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 표현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즉 동성을 사랑하는 성적취향을 가지는 동성애자와 달리, 남자인 자신 속의 여성성, 여성인 자신 속의 남성성이 더 자연스러운 자신의 성(gender)정체성이라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CD들로 여성들과 결혼생활을 유지하며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와 명망이 있는 남자들이다. 그들은 호젓한 숲 속에 그들만의 은신처인 방갈로에 정기적으로 모여, 여성의 화장과 옷을 입고, 그 순간만큼은 스스로를 여성으로 여기며 여성의 이름을 갖고 여성으로 존재하는, 남자 아니면 여자라는 이분법적 사회통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즐긴다. 곧 생물학적 성기의 다름으로 구별되는 성(sex)정체성이 아닌 자신이 느끼는 심리적, 정서적 성(gender)정체성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80년대, 남성을 적대시하며 남성이 아닌 순수 여성끼리 만의 관계가 가장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급진주의 여성학은 여전히 여성 아니면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틀에 갇혀 있었다. 그러던 여성주의가 21세기에 들어서서 포스트모던과 해체주의, 탈식민주의 철학과 만나면서 새로운 개념의 전환을 맞았다. 결국 성(sex)의 문제가 아닌 인류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해체되고 다시 세워진 관습적 성(gender) 개념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젠더정체성 문제에 집중한다. 그로인한 큰 깨달음은 이분법적 관습, 사회통념 속에 그 정체성이 강제 규정되어 온 것은 비단 여성, 여성성만이 아니라 남성, 남성성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새로운 젠더정체성 개념은 정상과 비정상으로 가르고, 심지어는 동성애자 혹은 성정체성의 다름을 드러내는 성소수자들을 수치, 사회악질범죄와 정신병으로 여겨 감옥에 가두고 사회적 파문을 감행했던 과거 성에 관한 모든 이분법적 사회관습을 파기하고 해방시킨다. 곧 여성성 vs 남성성, 이분법적 대결 구도가 아닌, 여성성과 남성성, 모두가 모든 인간 안에 공존하며 각자가 인식하는 고유의 성정체성을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각자 고유한 진정한 인간 정체성, 그 다양성을 인정받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작품 <까사발렌티나>의 시대배경은 1960년대 미국이다. 여성의 권리신장, 부당한 전쟁반대, 인종차별금지, 기존 가치와 권위를 향한 젊은 세대들의 격렬한 의심과 저항 그리고 도전, 그로인한 청년운동과 사회변혁운동이 거세게 확산되던 혼란과 동요의 시기였다. 아울러 외면하고 혹은 스스로 숨겨왔던 성소수자들, 그들 자신의 인권을 향한 움직임도 사회를 향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고자 꿈틀대던 선구자적 시기였다. 작품 속 등장인물, 샬롯과 발렌티나(남성이름, 조지)의 염원이 바로 그렇다.

 

발렌티나 자, 모두 자리에 앉으셨으면, 샬롯, 발표하시겠어요?

샬롯 (생략)(과장되게) 숙녀 여러분! 우리 이제 공식단체가 됐어요! 오늘 오전부로 우리 신여성회가 합법적으로 인정받고, 미국의 비영리 조직으로 등록됐어요!

발렌티나 (박수를 유도한다.) 정말 대단하죠?

샬롯 회원 수가 엄청난 속도로 늘고 있어요.

베씨 치즈케잌 덕분인가요?

샬롯 제가 오늘 여기까지 온 이유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과 함께 뉴욕 지부를 만들기 위해서예요. 회장으로는, 물론 여러분도 동의하실거라 믿지만, 발렌티나가 맡아줬으면 해요.

테리 이거 정말 신나는군요. (기대가 되네요)

베씨 축하해요, 발렌티나.

발렌티나 축하는 아직 일러요. 정식으로 투표 해야죠. 물론 절 뽑아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지만.

샬롯 개인적으로, 발렌티나가 회장으로서 제 업무를 돕는다면, 제겐 구세주나 마찬가지에요. 사실 저 혼자 여기저기 다니느라 많이 지쳤거든요.

발렌티나 정말 설레여요 (기대되는 일이에요.)

샬롯 우리 이제 공식단체가 되었으니, 소수자로서 느낀 어려운 상황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릴 수 있게 됐어요. (이하 생략)

 

특히 샬롯과 발렌티나는 CD를 동성애자와 동일한 것으로 오인하는 사회의 시선을 바로잡고자 한다. 그들은 조직원에게 그들의 조직, “신여성회‘가 법적으로 정당하게 인정받기 위해서 필요한 회원의 실명, 신상공개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각자의 본인확인서를 준비해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다른 조직원인 테리, 베씨, 판사 에이미는 지금껏 비밀을 유지하며 지켜온 가정 안에서의 또는 사회적 지위 안에서의 평화를 깨길 원치 않고 이 요구에 반대한다. 이에 당황한 발렌티나는 자신이 지녀온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그들 성소수자들 안에서도 성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글로리아는 엄중히 경고한다.

 

글로리아 정말 우리가 그들(동성애자)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해요? 편견, 박해, 외로움, 그리고 자기혐오는요? 본인에게 문제가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하거나 남몰래 이중생활을 하는 사람들 없을 것 같아요?

 

글로리아 (생략) 자, 어쨌든 여자들의 몸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이성애자가 되는 건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여자들의 옷을 입고 싶어 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호모인 것도 아닌 거죠. 당신과 내가 그 어떤 정신과 의사보다도 잘 아는 게 있다면, 그건 검정과 하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그저 무한한 회색만 존재한다는 거예요. (이하 생략)

 

그들 스스로도 그들의 정확한 성정체성 경계의 모호성 속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조지는 여성으로 분(粉)한 발렌티나가 남성들에게 얼마나 여성으로 인식되는지 알고 싶어 남성을 유혹하며 흥분한 적이 있고, 판사 에이미는 미란다로 변신한 조나단에게 키스하다 그에게 맞아 코뼈가 부러지는 해프닝이 일어난다. 하지만 누구도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낸 판사 에이미를 함부로 단죄하지 못한다. 그들 스스로 겪는 성정체성의 방황 속에서 우리는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등장인물 리타를 주목하게 된다. 남자이면서 여성인 그들 사이에 조력자로서 존재하던 조지의 아내, 리타는 이러한 소동을 지켜보며 두려움을 느낀다. 그의 남편, 조지가 사라질까봐!

 

리타 조지가 자주 하는 말이, 내가 없으면 자긴 길을 잃는대요.

베씨 길을 잃어요? 글쎄, 길을 읽기보단 그냥 사라질 것 같은데. (이하 생략)

 

 

리타는 그의 남편, 조지를 사랑하고 조지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아내를 사랑하고 의지하지만, 조지가 발렌티나로 존재할 때 리타는 필요치 않다. 리타는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리타 아니. 다른 뭔가가 있어. 나 지금 이해하려고 굉장히 노력하고 있어… 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조지?

(중략)

리타 원하는 게 뭐야? 뭐든 가질 수 있다면, 그게 뭘 것 같아? 샬롯이 원하는 건 알 것 같아. 그녀는 세상을 정복하고 싶어 해. 하지만 당신은 그런 거에 관심도 없잖아.

발렌티나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야?

리타 이해 시켜줘, 조지. 나 이해가 안 돼.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끔 그냥 놔두고 있잖아. 아니 어쩌면 당신이 유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대체? 제발, 조지. 우리가 가진 모든 걸 잃어도 될 만큼 당신이 원하고 있는 게 뭐야? 응?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구?

발렌티나 평범하고 싶어. (주위가 충격에 조용해진다.) … 평범하고 싶어.

 

조지에게 가장 평범한 모습은 무엇일까. 리타는 조지가 영영 발렌티나로 존재하길 선택할까봐 공포를 느낀다. 남자로서의 조지의 존재가 영영 사라질까봐! 그러면 리타는 그녀가 생을 던져 사랑했던 한 남자, 그녀의 남편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타 우리가 함께 한 세월 동안, 내가 당신을 떠날 거란 생각 한 적 있어? 아님 내가 왜 남아있는지 궁금한 적 있었어? 모든 걸 다 알고 시작했지만, 다 이해한건 아니었어. 어젯밤에 베씨가 자기 자신과의 결혼생활이야말로 완벽하다는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모든 게 완벽하게 이해되는 거야. 당신과 발렌티나 사이엔 여지가 없어. 모든 생각을 함께 나누고, 비밀은 없지. 우린 그렇게 할 수 없잖아. 당신과 내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당신과 발렌티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둘은 완벽한 커플이니까. 난 언제나 외부인일 수밖에 없어.

조지 난 베씨가 아냐. 당신 없으면 난 길을 잃어버릴 거야.

리타 알아. 그렇게 말했었잖아.

조지 (리타를 떨쳐버리려고 한다.) 한숨 자야 되는 거 아니야?

리타 (더 이상 조심스러워하지 않는다.) 발렌티나에게 난 뭐야?

조지 뭐? 리타, 그만해.

리타 내가 당신의 아내라면, 발렌티나에게 난 뭐야? 당신은 조지야, 아니면 발렌티나야? 선택할 수 있다면, 당신은 누가 됐으면 좋겠어? 어젯밤에 평범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게 발렌티나야? 발렌티나가 당신의 평범이야?

조지 좋아. 내가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기 원해? 그렇게 할게.

피하려고 하지만 리타가 바로 앞에 있다.

 

리타 오늘이 그날인가? 나 한 번도 말한 적 없지만, 항상 머릿속에 맴돌았던 게 있어. 당신이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가, 그 뒤로 두 번 다시 조지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오늘이 그 날인가?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조지는 자살했다고 말할까? 자살이나 마찬가지잖아. 그치? 피도, 시체도 없는 죽음. 그럼 당신은 애도할 건가? 그를 애도할 사람이 있기나 할까?

조지 도대체 왜 이런 생각들을 하는 거야?

리타 당신이 이곳을 살리든 말들, 아님 다른 곳에 새롭게 시작하든, 이름을 바꾸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이곳에 더 어울리는 이름은, ‘까사 발렌티나’인 거 같아. 결국 여긴 그녀의 집인 거잖아, 그렇지 않아? (심각하게 자극한다.) 그렇지 않아?

조지 맞아.

리타 (놀란다.) 그래? (그 명백함에 받아들인다.) 그래. 그럼 ‘까사 발렌티나’가 맞네.

조지 날 떠나지마, 제발. 당신 떠나면, 나 죽어…(이하 생략)

 

 

작품 <까사발렌티나>는 이렇게 열린 결말로 막을 내린다. 작품 내용을 구체적으로 세세히 거론하는 것은 본인에겐 정말 이례적인 것이다. 공연 관람을 하는 내내 하나의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이 작품의 기획의도 말이다. 관객의 주요 타켓층이 어디일까. 과연 관객이 어떤 관점으로 이 작품을 이해하길 바란 것일까. 진정한 기획 목적이 무엇인가. 크로스 드레서들을 통한 젠더정체성의 진지한 담론을 끌어내기 위해서인가. 여장한 남자들이 혹은 남자배우들이-사실 배우들의 대부분이 뮤지컬계에서 꽤 팬 층이 두터운 배우들이다- 여성의 모습을 얼마나 흡사하게 닮게 연기하는 지, 보고 즐기게 하기 위해서인가. 사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때부터 ‘옷 바꿔 입기’라는 극적장치는 엄청나게 인기 있는 대중적 오락거리였다. 그랬다. 작품<까사발렌티나>는 기획의 혼란이 엿보인다. 이러한 기획의도의 혼란은 곧 관객의 혼란이 되어 나타났다. 프로덕션은 상업적인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아 여장한 남자배우들의 노련하고 재치 있는 연기를 통해 대중적 재미를 주고자 한 것 같다, 그러나 작품의 본성 자체가 무거운 사회적 담론을 그것도 매우 진지하게 끌어내고 있어, 관객은 끊임없이 등장인물의 상황과 처지를 목격하고 귀 기울이며 진지하게 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람 내내 맘 놓고 웃지도, 웃지 않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웃고 난 후엔 왠지 모를 죄의식을 느낀다. 상업연극이 늘 제공하는 신나는 오락적 재미, 코믹성을 기대하고 온 관객들은 뜻밖의 낯설고 진지한 주제의 무거움에 차마 맘 놓고 웃을 수 없었다. 더 드러나는 문제는 우리나라의 일반관객이 젠더정체성의 문제인식에 있어 아직 낯설고, 어색하고, 심지어는 부담스럽고, 불편하며, 혹은 약간 혐오스럽고, 혹은 다른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며 꽤 보수적인 척, 난 이걸 즐기지 않는다는 걸 노골적으로 표시하거나 가장해야할 것 같은 심리적 방어막이 생기는 초보단계라는 것이다. 본인 옆의 남학생은 공연 내내 고개를 다리 사이에 처박고 있었고 초등학교 여학생과 그의 어머니인 듯 한 여자관객은 공연 중간에 자리를 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과 연출은 이 질문을 열심히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배우들과 연출은 이 작품의 본성과 등장인물의 진정성을 진지하게 숙고하고 연기와 무대에 담아내고자 노력했고 관객에게 이를 소중히 전달하고자 의도했다. 즉 여자를 연기하는 남자배우들은 여자인 척, 단순히 목소리를 여자처럼 바꾸고 과장되게 ‘여자입네’하는 관습적 이미지를 답습하려 하지 않았다. 남자인 그들 속의 여성성을 드러내려고 노력했지 흉내 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우 자신이 가진 목소리 그대로, 손끝, 앉음새, 무심코 난간에 기대는 뒷태, 등 작은 움직임을 통해 관객이 흉내가 아닌 진정한 여자사람을 만날 수 있게 유도한 것이다. 특히 샬롯에게 동성애자임을 발각 당하고 협박받은 판사 에이미를 연기한 배우 장용철은 점잖은 상류층 중년여성이 긴장할 때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동작, 문득 서글픔에 울 때 입을 틀어막는 두 손 모양새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는 글로리아의 손길을 고마워하며 토닥이는 손끝, 등의 작지만 미세하고 세세한 자연스러운 여성적 태도를 연기에 드러냄으로써 여성임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성을 연기하는 남자배우들 스스로가 크로스 드레서들에 대한 이성적 논리적 이해만이 아닌 완전한 정서적 동일체가 되기에는 아직은 한계가 있었음을 또한 드러낸다. 이러한 배역을 연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배우들이란 존재가 아무리 스스로를 버리고 새로운 인물의 가면을 쓰는데 능수능란하더라도 배우 자신 스스로 인간으로서 아직 충분히 사회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지 못한 사회적 담론에 대한 그 혼란스런 상태를 들키지 않고 연기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작가 하비 피어스타인은 이런 노트를 희곡에 명시했다.

 

성별에 대한 노트

배우들이 남장일 때엔 남성적인 것을 강조해야 한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여장을 한 때엔 편안함이 드러나야 한다.

밝고, 기분 좋고, 편해 보여야 한다.

 

 

무대 위에서 여성을 연기한 남자배우들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하고 살짝 흥분한 듯 상기되어 보였다. 등장인물들은 자신들만의 이 방갈로를 숨 쉴 수 있는 곳, 자신들만의 천국, 파라다이스, 가장 본인의 본성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편안한 곳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무대는 그렇게 배우들에게 정서적으로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성정체성의 혼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현하고 드러내는데 겪는 배우의 혼란이 미처 감춰지지 않아 아쉬웠다. 여성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남자들 세계 속, 그들을 목격하고 관찰하는 리타의 숨겨진 심리적 시선의 부재도 아쉽다. 진지하게 접근했지만 대중성을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어서일까. 작품의 주제 의식을 더욱 명확히 해주는 맺고 풀어주는 연출력의 아쉬움도 보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뒤로하고 작품 <까사발렌티나>는 의미 있는 용감한 시도임에 틀림이 없다. <까사발렌티나>의 배우들이여! 그대들은 아직은 한국사회에 낯선 사회적 담론을 끌어내는 선구자들이다! 지금도 충분히 훌륭하다. 그러니까 부탁하고 싶다! 무대에서 더 자신 있게 용감해지기를! 더 과감해지기를! 그러고 보니 작품 속 또 한 줄의 의미 있는 대사가 떠오른다. 베씨의 대사이다. ‘거울 속에 누가 있는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옳다고 느끼는가?’ 우리 모두는 젠더정체성만이 아닌 스스로의 정확한 존재정체성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 한다. 다시 반복한다. ‘거울 속에 누가 있는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옳다고 느끼는가?’

 

이 물음이 작품 <까사발렌티나>의 정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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