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슬라프스키 – 브레히트 (4/5)/ 이재진

스타니슬라프스키 브레히트 (4/5)

S T A N I S L A W S K I – B R E C H T

이재진(단국대 명예교수)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이라고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극(비극)은 감성을 중요시하며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댄다. 특히 애통함과 두려움”(연민과 공포)을 관객에게 심어주어 감정의 순화(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연극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브레히트는 관객의 자세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객이 무대의 진행상황을 감정(emotio)이 아니라 이성(ratio)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선동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emotio’를 강조하며 프랑스, 독일 고전주의 작가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을 도덕적으로 좀 더 고양된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이라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면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서사극의 경우 감성적인 부분을 온전히 배제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두 요소를 완전히 따로 분류해 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

 

 

스타니슬라프스키 체호프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1896년 페터르부르크에서 무대에 오른다. 체호프가 죄지은 듯 황급히 도망칠 정도로 공연은 참혹한 실패였다. 이미 언급한 바가 있지만 1898스타니슬라프스키는 단첸코( Dantschenko)와 함께 모스코바 예술극장’(MChAT)을 창립한다. 이 극단에서 그 당시 별로 이름이 없던 체호프 작품을 거의 모두 공연한다. 1898 단첸코가 연출한 [갈매기]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극작가 체호프 개인에게는 물론 러시아 연극에 커다란 획을 긋는 큰 사건이 되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작가 뜨리고린 역을, Meyerhold가 아들 뜨레쁠레프 역을 맡았다.

모스코바 예술극장은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연기술을 개조하고 새로운 연기법을 고안하고 있었다. 스타 중심이 아니라 다듬고 연마된 배우를 무대에 세워 앙상블 중심의 공연을 만들었다. 이에 체호프의 작품이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은 물론 배우와 배역 간에 완전한 몰입이 이루어지도록 요구한다. 모스코바 예술극장에서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준비된 연습을 통해 공연하였다. 이는 현대연극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마이닝거 궁중 극’(Meininger Theater)의 영향이 컸다.

러시아 국립연극 아카데미(GITIS. 1878 설립)가 주도하던 시절에는 배역이란 자아(작중 인물)는 실제 여러 체험 속에서 살아가는 배우자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예술적 자아로 이해했다. “나와 배역배우와 작중인물 (dramatis persona)과의 관계는 기존의 러시아 연극세계에서는 연극배우라는 자아는 예술적 자아와는 관계를 주지 않았다. MChAT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에서는 예술적 자아와 배우라는 개인적 자아와의 결합과 조화를 통해 사실적 연기를 창조해 내려고한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그때까지 내려오던 웅변조에 지나친 기교에 빠진 전통적 연기법을 바꾸려고 투쟁(!)을 했다. 사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심리적 연기를 요구했다, 즉 어찌하면 배우가 작중 인물 속으로 완벽하게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가 문제였다. 브레히트는 이와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 연극에 부합하는 이런 연기법에서 벗어나려고 투쟁했다. 그래서 자신이 추구하는 연극세계를 아리스토텔레스 연극이라 불렀다.

 

스타니슬라프스키 연기론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만약 그랬다면”, 혹시나 그랬다면 어찌 되었을까을 가정한다. 배우는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어떤 상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이 체험했던 어떤 상황을 찾아내 서로 병행시킨다. 자신의 체험 속에서 그와 유사한 상황을 기억해 내고 그에 맞추어 실제처럼 이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홀아비 역을 표현하려는 연기자는 죽은 자기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찰과 모방 아니면 기억이나 체험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즉 연기란 육체와 영혼의 결합과 조화이며 상호작용인 것이다. 인간은 마음속에 잠겨있는 감정이나 느낌, 정서적 변화 등을 동작을 통해 즉 몸짓, 손짓, 거동, 걸음걸이 등을 통해 외적으로 표출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주의적 연극을 신봉한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가 될 때 가장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이란 모름지기 내적으로 변화하는 의지, 이성, 감정, 상상력, 무의식 등을 몸뚱이는 예민한 기압계처럼 밖으로 그대로 드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신과 배역과의 관계 속에서 항상 방황하게 된다. 배우는 체험과 느낌을 토대로 즉 감성적 기억속에서 자신의 극중 역할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생각했다. 기억되는 어떤 상황과 역할과 일치시키라는 이런 요구가 그리 쉽지 않자 내적 체험을 외적 동작으로 바꾸는 신체적 동작방법을 고안해 내기에 이른다. 이를 심리 신체적 움직임으로 정리하게 된다. 작가가 정해 놓은 환경 속에서 배우는 그 인물을 대신해서 행동으로 보여준다. 신체적으로 표현된 인간의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나타남 그 자체만 가지고 모두 규정지을 수 없다. 손수건을 찾는다거나 창문을 열 때 그 행위 속에는 구체적인 이유와 뚜렷한 목적이 수반되기 때문에 배우는 그런 내적인(심리적) 부분을 구별해서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일체감은 연기법의 핵심으로 간주했기에 배우와 배역간의 하나 됨이야말로 스타니슬라프스키에게는 바로 창조의 순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감정과 행동은 결합되어 있다고 인식했다. 즉 어떤 특정의 동작은 구체적인 어떤 감정에서 우러나온다. 무의식적인 감정은 의식을 통해 동작과 결부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 이론은 요즘 치료방법(음악치료, 춤 치료, 연기치료 등)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배우의 몸은 일종의 전달수단으로 이용 된다. 정신과 육체가 하나로 융합되면 배우는 비로소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술을 가능한 자연스런 연기에 이르게 하려는 이 두 방법은 자연주의 연극에 부합된다.

 

사회적 몸짓(Gestus)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브레히트를 비교하다보면 게스투스(Gestus)개념에 부딪치게 된다. 이 개념은 서사극의 핵심이다. 게스투스란 몸짓, 마임, 교감 등을 총체적으로 말한다. 브레히트는 특히 북경 오페라’(경극)의 게스투스가 갖는 의미에 감탄했다. 경극에서는 극중인물의 특성이 중요하지 않고 환상의 세계를 크게 요구하지 않고 장식이나 무대장치도 간략하게 처리되고 무대는 수시로 중단된다.

생선을 판다고 치면 장사꾼은 많이 팔기 위해 거기에 맞는 몸짓을 보이게 마련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언장을 쓰는 남자, 사내를 유혹하는 여자, 시민을 패대는 경찰, 여러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남자 등은 그 상황이나 신분에 맞는 몸짓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 서로간의 관련이 이어질 때 이를 사회적 몸짓(sozial-Gestus)이라 한다. 누가 신을 부르며 기도한다면 기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들과 연계될 때 비로소 이런 몸짓은 사회적 몸짓이 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억척 어멈은 죽은 딸의 시체를 안고 슬퍼하다가 농부들과 장례비용을 흥정할 때는 아주 딴 사람처럼 냉정해 진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었다가 많다는 듯 망설이다 조금 다시 빼앗는다. 이 장면에서 억척어멈은 어느 상황에서도 장사치의 본능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 강조된다. [백묵원]에서 처녀 그루세가 총독의 아이를 업고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배고프다고 보채는 아이에게 젖을 주려고 농가에서 염소젖을 산다. 농부의 염소젖은 터무니없이 비싸다. 염소 젓을 팔 때는 그리 인색하고 매정하던 농부는 그루쉐가 떠날 때는 아이를 받아 업혀주는 등 매우 친절하다. 농부가 원래 매정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전쟁이 그런 상황을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실연당한 한 젊은이가 자살하려고 약을 산다. 약국에서 싸고 효력이 빠른 쥐약을 고르느라 애를 쓴다. 이와 같이 어떤 몸짓이 특정한 사회적 문제(특히 돈)와 연계되어 나타날 때 사회적 몸짓이 된다.

 

브레히트 무대’(Brecht-Bühne)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소도구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배우의 감정을 불러내려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이용도구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소도구를 이용한 작은 놀이를 중시했다. 예를 들면 테니스공 주고받기가 있다. 예상하지 못하는 공의 방향에 따라 그때그때 상황을 만들어 공을 주고받으며 상대방과 대사를 주고받는다.

브레히트의 연극에서도 소도구는 아주 세밀하게 제작한다. 무대장치가 Caspar Neher는 오랫동안 브레히트의 서사극 무대를 전담했다. 전체무대는 환상의 세계가 아님을 노골적으로 밝히지만 소도구나 일부 배우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아주 세밀하게 꾸며준다. 이에 따라 조명은 객석까지 밝게 비추어 연극하고 있음을 일깨어 준다. 막이 열린 상태에서 무대장치를 바꾼다. 무대는 흔히 2단계로 나누어 설정한다. 무대 앞쪽에서 극이 진행되고 뒤쪽은 그림으로 그리거나 환등기로 비추어준다. [어머니]에서 앞쪽은 어머니 Wlassowa의 작은 방이고 뒤쪽은 거대한 공장지대가 투시되어 있다.

소도구나 무대장치의 세밀하고 적극적인 활용은 서사극하고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아이들]을 예를 들면 억척어멈은 마차에 물건을 잔뜩 싣고 전선을 누비며 팔러 다닌다. 연출가 브레히트는 온갖 군수품의 양이나 숫자를 정확하게 맞추어주기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수저는 250, 군화는 20 켤래, 동전은 50개 등으로 정했다고 치자. 매번 공연 때마다 이 숫자는 딱 들어맞아야 한다. 무대전체는 비사실적으로 꾸미면서 연기자와 직접 손에 닿는 소도구나 대도구는 아주 세밀하게 다루는 무대를 희곡론에서는 특별히 브레히트무대’ (Brecht-Bühne)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소도구를 이와 같이 사실적으로 이용해서 연출하는 이유와 의미는 무엇인가?! 연기자의 연기를 위한 조치이다. 사실적인 연극이라기보다는 경우에 따라서 부분적으로만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선택된 자연주의적 무대인 셈이다.

이런 섬세한 브레히트무대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무대철학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심지어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객석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무대 뒤편의 무대장치까지 상당부분 사실적으로 장치해 놓는다. 무대 뒤에 있을 뒤뜰이나 정원, 출입구까지 사실적으로 꾸며 놓는다. 이는 배우들이 등장하면서 그 분위기에 쉽게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생활에 찌들은, 가정문제에 얽매인 배우가 극 속의 인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내기란 매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층건물과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사이를 헤치고 서둘러 극장으로 달려온 배우들에게 빠른 시간 안에 그 분위기 속에 적응시키기 위함이다. 심지어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가능하다면 무대장치 자제자체를 원산지(극 속의 배경이 되는 곳)의 것을 사용하고 싶어 한다. 만약 [춘향전]을 연출한다고 가정하면 소도구나 대도구를 직접 남원에서 가져다가 사용하고 조선의 분위기가 나도록 연못이 딸린 뒤뜰까지 무대 뒤에 설치했을 것이다.

 

카프카 – [어는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배우 클라우스 캄머(Klaus Kammer. 1929-1964)는 전후 독일 최고의 연기자로 인정받았다. [성난 채로 돌아보라](오스번), [안도라](프리쉬), 클라비고(괴테) 등 여러 배역을 맡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카프카의 [어는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KAFKA. Ein Bericht für eine Akademie. 1917)로 유명하다. 캄머는 빨간 원숭이로 분하고 순회공연을 했다. 우리도 이 작품을 70년도 부지런히 무대에 올렸다. 주인공 퍼터의 역은 여러 배우들이 흉내를 냈지만 캄머를 능가할만한 공연(TV 1963)은 없었다고 언론은 평가했다. 공연하기에 앞서 캄머는 오랫동안 동물원에서 원숭이를 관찰했다. 배우는 자기만의 체험과 느낌이 있다. 극중 배역을 만나 작품속의 인물을 해석하고 표현할 때 이런 감성적 추억이 작용하게 된다. 마치 자신이 그 인물인 듯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브로드웨이의 연극과 비교해 본다.

 

배우가 잠자는 역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어느 날 공연에 배우가 너무 피곤해서 그만 실제로 잠이 들고 말았다고 가정해 보자. 두 번의 공연을 모두 본 관객이라면 어떤 경우를 더 실감나게 받아드릴까? 이럴 경우 브레히트와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요구하는 연기방법은 서로 같지만 또한 서로 다르다. 브레히트는 배우에게 잠자는 역을 연기하고 있음을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실제로 자고 있는 듯 착각을 주는 그런 실제 같은 연기를 요구한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경우에도 배우의 연기 아닌 실제로 잠자는 행위는 하지만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배우는 잠을 자고 있는 것이지 연기를 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의 한 장면과 이를 비교해 보자. 제임스 캐그니(James Cagney)가 주연한 미국 영화를 소개한다. 너무 오래 돼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여기저기 애써 찾아보았다. [더러운 얼굴의 천사들] (Angels with Dirty Faces. 1938)이란 영화다. 이 영화에 험프리 보가트는 악당 변호사 제임스 프레지어 역을 맡았다. 캐그니가 선과 악의 중간쯤에 서 있다면 보가트는 악과 악의 한가운데 서 있다.

캐그니는 영화 속에서 깡패두목 럭키(Rocky Sullivan) 역을 맡았다. 감옥에서 징역을 살고 난 럭키는 다시 고향인 시카고로 돌아온다. 어린 시절 럭키와 함께 골목을 주름잡던 친구 제리(Jerry)는 그사이 개과천선해서 신부가 되었고 이제 젊은이들을 선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어려서 자그마한 럭키는 제리보다 빨리 뛰지 못해 혼자 경찰에 잡히기도 했지만 이제 시카고의 골목길을 헤매는 길 잃은 젊은이들에게 우상이고 영웅이다. 이들 젊은이들에게 힘은 정의이고 선이기 때문이다. 럭키는 젊은이들에게 바로 이런 힘의 상징인 것이다.

제리는 변호사 제임스(James Jim Frazier)의 부정을 파헤치려다 위험에 빠지게 된다. 럭키는 위험에 처한 친구를 구한다. 그 대신 자신은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사형집행 직전 형무소에 찾아가 신부는 친구에게 젊은 애들을 위해 비굴하게 죽어달라고 애원한다. 일생을 투쟁의 일념으로 거칠게 살아온 럭키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자존심을 버릴 수는 없다고 이를 완강히 거절한다. 전기의자로 끌려가다가 럭키는 하지만 갑자기 살려달라며 몸부림치며 쓰러진다. 자신들의 영웅이 죽음이 두려워 비굴하게 무릎을 꿇으며 삶을 구걸했다는 소식을 들은 젊은이들은 너무나 크게 실망한다.

 

Did Rocky die as they said, like a yellow rat?

It’s true, boys. Every word of it. He died like they said. All right, fellas. Let’s go and say a prayer for a boy who couldn’t run as fast as I could.

 

럭키는 신문에 난 것처럼, 그렇게 겁쟁이처럼 죽었나요?

그래 얘들아. 글자 그대로야. 신문에서 말하듯이 럭키는 그렇게 죽었단다. 이제 됐다, 얘들아. 어서 가서 그 친구를 위해 기도나 올려라, 나보다 빨리 뛰지도 못하던 그런 친구였지.

 

눈물을 흘리며 젊은이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진다. 영웅으로 우러러 보던 럭키에 대한 환상은 모두 깨진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연기해야 될까? 정말 겁쟁이인 것처럼 아니면 겁쟁이처럼 보이도록?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브레히트는 어떤 연기를 요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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