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최승연

보편성은 어떻게 마련되는가
–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최승연(뮤지컬 평론가)

 

작: 김유현
음악: 이진욱, 김보람
연출: 오세혁
드라마타이즈: 윤상원
단체: HJ컬쳐
공연일시: 2016/07/21-08/25
공연장소: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관극일시: 2016/08/24 4pm

 

rachmanino

 

뮤지컬 <파리넬리>, <빈센트 반 고흐>, <살리에리> 등 ‘예술가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 HJ컬쳐의 뮤지컬 <라흐마니노프>가 객석점유율 96%, 유로 객석점유율 80%라는 성적으로 한 달간의 공연을 마쳤다. 이 결과는 그 자체로, 작품이 비교적 소규모로 제작된 창작 초연이었다는 점에서 꽤 이례적이다. 심지어 2016년 여름의 대형 기대작이었던 <페스트>와 <스위니 토드> 사이에서 선전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의 무엇이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일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객석의 분위기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을까?

 

‘치유와 위로’의 드라마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는 작품의 유명세에 비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작가 김유현과 작곡가 김보람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소재의 참신함을 음악의 유명세와 결합해 놓았다. 이 작품의 미덕은 인물의 일대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놓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상실감에 빠져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던 라흐마니노프의 20대 중후반의 시기, 다시 말해 삶의 ‘공백기’에 집중한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작품은 라흐마니노프의 가장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Piano Concerto no.2 C minor)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2인극으로 극화한다. 유연한 선택과 집중이 돋보이는 전략이다. 작품의 성공은 이 전략에 따른 명민한 방향 설정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라흐마니노프>가 처음부터 이렇게 만들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4년 창작뮤지컬육성 지원사업 대본공모에 우수작으로 당선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선 이후 김유현과 김보람이 직접 제작사 HJ컬쳐에 연락을 취해 제작이 본격화되었고 2015년 시범공연을 거치며 작품의 모양새를 갖추어 나갔다. 대본공모에 당선될 당시 작품 제목은 <모스크바의 종>(이 제목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 교회 종소리 음형에서 파생된 음악적 세포가 의식, 무의식적으로 들어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었는데 라흐마니노프의 청년기에 초점을 맞춘 것은 실제 공연과 다르지 않았으나 약 2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파노라마식’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 긴 러닝 타임과 일대기식 구성, 상투적인 넘버의 사용 등은 선정 당시 초기 텍스트의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실제 공연은 이러한 모양새에서 벗어나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 사이의 관계 맺기로 드라마의 큰 흐름을 바꾸고 라흐마니노프의 과거 회상 장면에 등장하는 쯔베레프와 차이코프스키를 달 박사를 연기하는 배우가 1인 다역으로 소화하게 하여, 작품의 집중감을 끌어올렸다. 긴 러닝 타임 역시 1시간 30분으로 축약되었고 이에 따라 넘버 역시 14곡(작품 전체 넘버는 17곡인데, 세 곡이 리프라이즈 되었다)으로 정리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로 전형적인 ‘전기뮤지컬’의 형태를 벗어남으로써 작품은 라흐마니노프의 슬럼프 극복기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3-4년간 이어졌던 당시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라흐마니노프가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한 후 24세(1897년)에 정식으로 초연한 교향곡 1번(Symphony no.1 in D minor op.13)이 실패함으로써 극심한 절망감에 빠지며 작곡을 할 수 없게 되었으나 니콜라이 달 박사의 심리치료를 받고 28세(1901년)에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 자신의 연주로 초연함(10월 27일)으로써 재기에 성공하여 이 작품을 달 박사에게 헌정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 라흐마니노프는 사촌과 결혼하여 러시아 정교회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빈약한 정보를 기본 자료로 취하여 작품은 라흐마니노프의 감정과 심리의 추이를 따라가며 드라마를 완성한다. 따라서 이 작품을 두고 뮤지컬의 전형적인 요소들, 가령 드라마틱한 극의 변화라든지 결혼 비유(marriage trope) 같은 것을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작품의 드라마는 달 박사를 거부하던 라흐마니노프가 그를 받아들이고 치료에 응함으로써 재기에 성공한다는 한 줄로 요약된다. 단순해 보이는 극의 흐름을 바꾸는 미세한 변화는, 라흐마니노프가 달 박사와 처음으로 소통하던 순간과 달 박사가 라흐마니노프에게 ‘왜’ (교향곡 1번을 포함한) 음악을 작곡하려고 하는지 질문하던 순간에 마련된다. 이들의 첫 번째 소통은 함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함으로써 시작된다. 실제 비올라 애호가였던 달 박사가 차이코프스키의 <뱃노래Barcarolle>를 엉터리로 연주하자, ‘차이코프스키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로 각자의 어린 시절이 소환되는 방식이다. 달 박사의 어머니는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자장가로 불러 주었고, 집안에서부터 음악을 접했던 라흐마니노프는 자연스럽게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로 성장했다는 상상력이 어린 시절의 묘사 안에 가미되어 있다. 이들이 이렇게 소통을 시작하자, 작품은 일사천리로 라흐마니노프의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을 소환하여 그가 교향곡 1번을 작곡하는 장면까지 풀어 놓는다. 그리고 ‘교향곡은 작곡가의 무덤’이라며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던 스승 쯔베레프를 거역하면서까지 라흐마니노프가 ‘왜’ 교향곡 1번을 작곡했는지 설명한다. 이 국면에서 작품은 라흐마니노프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쯔베레프와 차이코프스키 사이의 대결 구도를 표면화하는 듯하지만, 대사와 상황 속에서 암시적으로 반복되던 라흐마니노프의 어떤 강박증이 완벽한 음악을 향한 원인임이 결국 밝혀진다.

‘왜’ 음악을 작곡하는가라는 달 박사의 질문이 따라서 라흐마니노프의 강박증을 치유하는 핵심 질문임은 자명해 보인다. 동시에 이 질문은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을 한층 더 내밀하게 만든다. 오로지 라흐마니노프의 내면에 집중했던 드라마가 이를 계기로 달 박사의 내면까지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식이다. 라흐마니노프에게 ‘왜’ 자신을 치료하는지 기습적으로 질문 받은 달 박사는 동문수학했던 선배인 프로이트의 명성을 뛰어 넘고 싶었다는 내재된 욕망을 털어 놓는다. 작품은 달 박사의 치료 행위가 세속적 욕망이라는, 불순하지만 개연성 있는 의도에 의한 것이었음을 드러내며 이를 라흐마니노프의 심연 한 가운데 있던 강박증과 겹쳐 놓는다. 라흐마니노프의 강박증은 건강이 나빴던 ‘엄마 같았던 누나’가 자신의 음악공부를 위해 희생했던 과거로부터 비롯되었고, 이는 언제나 완벽한 음악을 스스로에게 요구했던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작품은 이렇게 두 인물의 심연을 드러냄으로써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이제 남은 것은 ‘치유와 위로’라는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는 일이다. 작품의 흐름상 이는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는 새로운 곡을 쓰게 될 것이고 새로운 곡을 쓰게 되면 관객들이 나를 사랑해 줄 것입니다.”라는 위로의 말들은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의 입을 통해 반복되고 이는 일종의 주술처럼 라흐마니노프의 재기를 돕는다. 이제 두 인물은 모두 목표했던 바를 이루고, 담백하게 연출된 피아노 협주곡 2번 초연(헌정) 장면으로 과잉되지 않은 결말까지 한 걸음에 내딛는다.

따라서 실제 제작 과정을 거치며 일어난 텍스트의 변화는 창작진들의 명민한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강박의 원인과 그것이 치유되는 과정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위대한 인물의 ‘인간적 면모’를 전경화하고 이를 관객과의 소통 포인트로 찾은 것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특히 후반부의 긴 독백을 통해 라흐마니노프의 고통과 아픔을 날 것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관객이 라흐마니노프를 역사적 인물로 화석화시키는 대신 근원적인 아픔을 지닌 보통의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자아를 회복하는 치유의 과정을 공유하도록 한 것은, 이 작품의 핵심 전략이라고 판단된다. 이는 감정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표현대로, 치유문화가 필요한 지금/여기의 사회에 일종의 ‘프로이트 치료학의 문화산업 버전’처럼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조차 숨을 죽이던 수많은 여성 관객들의 관람 태도는, 특히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강화되어 있는 ‘위로와 치유의 드라마’가 (공연)문화산업의 콘텐츠로 얼마나 유효한지 증명한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이러한 맥락의 정곡을 찌른 작품인 것이다.

 

음악으로 소통하다

 

물론 뒷맛이 그리 개운치 않은 지점도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강박증을 굳이 ‘엄마 같은 누나의 희생’과 ‘자신과 누나를 억압하던 폭력적인 아버지’라는 클리셰로 채워야 했을까? 라흐마니노프의 가족사가 실제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특히 창작뮤지컬에서 오랫동안 반복되고 있는 이와 같은 성역할의 배치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심지어 달 박사의 내면 묘사 방식은 인물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개연성이 높아 라흐마니노프라의 인물형을 더 김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은 실제 공연에서 음악과 드라마의 긴밀한 결합으로 다소간 상쇄된다. 작품은 라흐마니노프의 서정적, 낭만적인 음악을 드라마에 충분히 녹여내고 있으며, 원곡이 아닌 창작곡을 사용할 때조차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스타일을 따르고 있어서 간극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앞서 설명한 드라마의 변곡점을 음악과 소리가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물 사이의 첫 소통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으로 시작된다는 점(따라서 달 박사의 엉터리 비올라 연주는 작품 초반부터 반복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인물의 내면이 ‘소리’로 구체화된다는 점은 이 작품이 말과 음악, 말과 소리를 긴밀한 소통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라흐마니노프의 강박증이 모스크바의 종소리와 오버랩되는 울음소리로 표현되거나 달 박사의 유학시절 외로움이 우연히 듣게 된 피아노 소리로 위로되는 장면은 이에 대한 대표적인 장면들이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담당한 피아니스트 이범재와 현악 4중주의 실내악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생생하게 남아낸다. 실제 유능한 연주자들을 공연에 기용한 HJ컬쳐의 선택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피아니스트 이범재의 활용은 라흐마니노프의 얼터 에고 및 공연의 연주자로 입체화되어 있어서 더욱 흥미로웠다. 그러나 공연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연주자들의 피로감이 누적되고 특히 공연의 호흡을 선두에서 조절하는 이범재의 피로감은 극에 달한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때로 더 드라마틱한 연주가 필요한 장면에서도 밋밋한 연주를 이어가던 그의 모습이 아쉬웠다. 피아니스트는 적어도 더블 캐스팅으로 채워져야 할 것 같다.

대규모로 기획된 창작뮤지컬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2016년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는 작품이다. 멜로디와 가사의 부조화에도 불구하고 불후의 창작뮤지컬 레퍼토리로 남게 된 <베르테르>처럼, <라흐마니노프> 역시 같은 길을 걷기를 기대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곡조와 가사의 삐걱거림은 두 작품의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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