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행진/ 양근애

검열을 검열하라
– <바보들의 행진>

양근애

 

원작 : 강유
각색/연출 : 이동선
단체 : 몽씨어터, 권리장전2016_검열각하
공연일시 : 2016/09/15~09/18
공연장소 : 연우소극장
관극일시 : 2016/09/17 pm. 7:00

 

지난 6월부터 시작된 ‘권리장전權利長戰2016_검열각하’의 공연 일정이 8부 능선을 넘어가고 있다. 첫 공연부터 빠짐없이 공연을 챙겨보고 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폭염이 누그러지고 어느새 가을바람에 놀란 살갗을 쓰다듬는 날이 많아져서일까. 미열에 시달리는 어지러운 시간들을 지나 이제 숨을 고르는 느낌으로 극장을 향하고 있다.

 

<바보들의 행진>은 총 스물두 편으로 기획된 공연 중 열여섯 번째 작품이다. 추석 연휴 기간에 올라가서인지 다른 공연에 비해 객석은 한산했지만 연우소극장에는 모처럼 활기가 넘쳤다. 이 연극에 붙은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제목은 1970년대에 하길종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한데, 영화에 빚지지도 갇히지도 않으면서 독특한 재미를 주는 공연이었다.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널리 알려진 대로 영화 <바보들의 행진>이 검열에 의해 많은 장면이 삭제된 채 개봉되었다는 사실, 둘째 이 연극이 영화 ‘윤석암에서의 하룻밤’을 검열 당한 영화감독과 검열관의 이야기를 다룬 ‘라디오 드라마’의 형식을 취한 연극이라는 점, 셋째 1970년대식 스토리와 대사, 연기방식을 고수하지만 당시의 검열을 ‘추억’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

 

첫 번째 지점은 곧바로 박정희 시대의 검열 문제를 환기시킨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5차례의 사전검열에 의해 이야기가 잘려나갔고 삽입곡인 ‘왜 불러’와 ‘고래 사냥’은 금지곡이 되는 등 수난을 겪었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흥행을 거둔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으로 거리를 뛰어다녔던 청년들의 분방한 모습을 음험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검열을 작동시키는 감시와 처벌의 기제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이었는지가 드러난다. 연극 <바보들의 행진>은 그 지점을 놓치지 않고 자유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바보’처럼 ‘행진’해 가야한다는 의미로 제목을 변주했다. 그 ‘바보’들 속에는 영화감독에 의해 자신의 노예적 삶을 돌아보게 된 검열관도 속해 있다. 하루에 시나리오 다섯 편, 영화 다섯 편을 보면서 기계적으로 검열을 하는 장만태는 군인이었던 아버지에게 교육 받은 대로 튀면 잘린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는 왼손으로 밥을 먹는 아들의 손을 때리면서 “이 나라에서 왼쪽은 절대 금기다”라고 말한다. 소아마비에 걸린 왼손잡이 아들을 누가 이상하게 볼까봐 학교에도 보내지 못하고, 상사인 권실장의 집에 아내를 일하러 보내는 그는 체제 순응적인 인물이다. 그랬던 장만태가 한현수 감독을 감시하면서 검열의 허구성을 깨닫고 각성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라디오 드라마의 주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왜 라디오 드라마로 구성한 것일까. 두 번째 지점이 그것을 말해준다.

 

<바보들의 행진>은 영화, 라디오, 연극이라는 세 개의 미디어가 교직되어 있다. 이동선 연출은 원작자가 시나리오로 썼던 것을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함으로써 연극의 시공간적 제한을 훌쩍 뛰어 넘는다. 영화의 검열을 둘러싼 이야기를 목소리로 전달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진행시키는 무대. 연극 <바보들의 행진>을 보는 묘미가 거기에 있다. 무대에 차려진 라디오 드라마 녹음 부스 덕에 관객들은 라디오 드라마를 들을 뿐만 아니라 라디오 드라마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배우들의 상황을 볼 수 있다. 배우들은 하나 이상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목소리 연기를 통해 캐릭터를 구분하기도 하고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편하게 앉아 쉬면서 다른 배우의 연기에 반응하기도 하는데 관객들은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보게 된다. 특히 음향을 맡은 배우가 문을 여는 소리, 강아지 소리, 걷는 소리, 물 뿌리는 소리 등을 절묘하게 만들어낼 때 관객들은 드라마의 구성 과정을 직접 보면서 한편으로 소리가 그려나가는 극의 내용을 동시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이 과정이 흥미롭기 때문에 연극은 지루할 틈 없이 흘러가고 자칫 촌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70년대식 이야기 구조가 힘을 받는다.

 

세 번째 지점, 즉 라디오 드라마 ‘바보들의 행진’이 박정희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캐릭터의 연기 방식이나 이야기 구조 역시 1970년대의 느낌을 강하게 준다는 점이 이 연극의 재미이기도 하다. 1970년대 광고와 노랫말, 과장 된 대사 톤, 왠지 ‘오그라드는’ 대사들, 전형적인 인물과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결말 등은 당시의 문화적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공연 방식에도 불구하고 현재 연극계에 일어난 검열 사태가 1970년대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상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연극의 의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검열이 잘못된 역사의 반복일 뿐만 아니라 더 나빠진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블랙코미디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극 중에서 권실장이 장만태에게 “검열관을 검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면이 있다. 장만태는 한현수 감독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더 과장되게 한감독을 위협하고, “기자들에게 알려지면 안된다”는 이유로 권실장의 폭력을 저지하는데 이 대목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정권의 나팔수가 된 언론을 떠올리며 씁쓸해진 사람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독재의 시대에 저항하고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를 만들었지만 더 교묘하게 작용하는 검열과 더 노골적으로 가해지는 억압이 예술과 삶을 짓누르고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바보들의 행진’의 메시지대로 자유를 향해 우직하게 행진하는 바보도 좋지만, 검열관을 검열하는 사람은 왜 실체 없는 검열을 할 수밖에 없는지 이제 우리가 검열할 차례이다. 이유도 명분도 없는 검열 때문에 움츠러드는 자기검열을 검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검열’이 텅 빈 기표임을 역사가 기억할 수 있도록, 묻고 따지고 보고 듣고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바보들의 행진>은 들으면서도 보이고 보이면서도 듣게 하는 연극이었다. 이 감각의 분리와 통합이 검열 사태에 대한 많은 생각을 진전시킬 수 있게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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