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허구리>의 공연평에 비친 ‘정치이념’/ 우상전

<산허구리>의 공연평에 비친 ‘정치이념’

 

우 상전(연극배우)

 

내가 이곳에 한동안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오세곤편집장에 대한 강한 불만 때문이다. 그런데 글을 쓰지 않는 동안 달린 댓글을 보니 (나의 의도와는 달리) 연극계에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올 우려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키지 않지만 다시 펜(?)을 들었다.
여기서 ‘나의 의도’란 제대로 된 반박도 없이 ‘삭제’를 당하는 현실에서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추측컨데, 다행히 정치적인 이유는 아닌 듯하다. 왜? 연극대학이나 교수들에 관한 글을 쓸 때만 제지를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좌우간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상세히 논해 보기로 하자.

 

왜 인간에게 ‘자기결정(판단, 분별)능력’이 중요할까?

내가 지금 쓰고자 하는 내용은 <한국연극> 11월호에 실린 내가 출연한 <산허구리>의 김미도교수의 공연평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곳에는 ‘공연티켓 1+1 악용사건’에 관한 내 글도 실려 있다.
여기서 먼저 말해 둘 것은, 이 글들은 <한국연극>의 원고 마감이 10월 20일까지여서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전에 썼던 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 박근혜정권의 약발이 떨어지기 직전에 쓴 글이다.
내가 11월호에 ‘공연티켓’에 관한 글을 쓰게 된 것은 <한국연극>의 편집기자가 직접 전화로 ‘공연티켓 사건’에 대한 의견요청이 있어 쓴 글이다. 그러니까 내가 일방적으로 ‘투고’한 글이 아니다.
그런데 편집자가 ‘내용은 월간 <한국연극>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라는 주(註)를 붙여놓았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투고’한 글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짜 ‘코미디’는 <한국연극> 어디에도 ‘공식견해’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 연극계는 ‘견해’가 없는 곳일까? 아니면 ‘숨기는 게’ 미덕이라고 여기는 곳인가?
아마 내 원고를 청탁한 편집기자가 내 글이 정부를 비방한 듯해서, 또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져, 아니면 이로 인해 말썽이 일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런 듯하다. 좌우간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의견이 없는) 동네에서 어떻게 관객을 모아 연극행위를 하는지(하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마디로 각자의 개성적인 의견은 사라졌다. 정치의 ‘진영논리’만 판을 치는 연극동네가 되었다. 시쳇말로 ‘그러려고 연극을 하는 것인지?’ 예전에는 개인의 ‘견해’가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관원이 ‘데리고 가서’ 고문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세상은 아니다.
외려 기관원보다 ‘댓글’을 더 무섭고 ‘지원금’을 안 주는 것을 더 두려운 세상이 된 게 현실이다. 어쨌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 ‘개성적 표현의 자유’를 찾는 일인 듯하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는 왜 정정당당하게 자기의 견해를 펼치지 못하는 것일까? 지원금 때문에, 아니면 자기의 의견이 없어서? 그저 정치판에서 늘 하던 소리나 반복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정말 답답한 동네임이 분명하다.
지금 박근혜대통령의 기상천외한 국정운영으로 나라가 시궁창에 빠져 난리다. 우리 못지않게 외국에서도 흥미로운 관심꺼리가 되고 있다고 한다. 21세기에 세상에서 보기 힘든 귀한(?) 구경거리여서 그럴 것이다.
이번 ‘최순실 사태’를 보는 국민 개개인들의 시각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따라서 박대통령이 세종시를 만들어 나라를 망친 일이나 ‘국회선진화법’으로 옴짝달싹 아무 짓도 못하고 임기를 마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여소야대를 만들어 레임덕을 자초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건 더욱 아니다.
이번 사태에서 내 귀를 자극한 ‘커다란 울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한때 박근혜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전여옥’ 전 국회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
“예전에 박대통령이 누군가 일러준 단어를 외워 말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 말이 내 귀에 깊이 꽂인 건, 바로 우리 연극인들도 (박대통령에 뒤지지 않게) 늘 누군가 일러준 ‘구호’만을 외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럴 때마다 드는 나의 자괴감은 “어찌 우리는 ‘자기결정능력’이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내 눈에는 박대통령이나 연극동네 사람들이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우리 사회전반에 걸친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허구리>의 김미도교수의 공연평은 나를 무척 놀라게 했다. 어쩌면 (예상된 일이긴 하지만) 연극판에 ‘정치이념’이 넘치다 보니 이제는 ‘공연평’마저 그렇게 가는구나 싶어서 하는 말이다.
김미도교수는 평에서 “김윤철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은 근현대극의 시리즈가 과거의 시각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기획”이라고 말했다. (출연자인 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러면서 “아무리 일제 치하에 검열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라고 해도 <산허구리>에는 당대 어촌 현실의 ‘구조적 모순’이 배어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함세덕의 <산허구리>가 오늘의 현실과 ‘오버랩’ 되어야 했다면서 몇 가지를 예시해 놓았는데, 어디서 늘 듣던 목소리여서 놀라웠다.
어쩌면 경제대국인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소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자기결정능력’의 결핍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국회도 의원 개개인의 ‘견해’는 없어 보인다. 있다면 오로지 ‘당론(黨論)’만 있을 뿐인 게 우리 세상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집단의 목소리(진영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통령을 위시한 모두가 자기 자신의 소신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사회체제는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개개인은 민주화가 되지 못한 게 현재의 대한민국의 불행이 아닐까싶다. 좌우간 우리 모두가 옳든 그르든 또는 맞든 틀리든, 자기의 소신을 말하면 절대로 지금처럼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모두가 박대통령처럼 자기 소신이 없이, “최순실선생님에게 컨펌(확인) 했나요?”라고 말하며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머지않은 장래에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이 시작된다고 아우성을 치는 21세기에 아직도 전(前)근대적인 ‘무속신앙화’ 된 통치철학의 지배하에 있는 현실이 정말 기가 차고 막힐 지경인데, 이런 현상이 ‘또 다른 형태’로 공연평에까지 등장하니 정말 할 말을 잃을 정도다.
그것도 오랜 기간 연극계의 최고 중진의 (평론가협회장을 지낸) 평론가이자, 직장이 ‘과학기술’대학인 교수가, 또 그토록 난해한 오태석희곡을 해설해주어 연극인들에게 감동을 준 그에게서, 이미 ‘무속화’된 정치논리를 듣는다는 것은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예상할 수 있는 일이라 해도) 이처럼 ‘정치도그마’에 빠져 있다면 박대통령의 무속신앙과 무엇이 다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평론가 김미도의 <산허구리>의 공연평을 읽고

지금부터 내가 ‘아는 척’을 시작해 보겠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기면 누군가 나타나 ‘휘슬’을 불어대는 나라’가 선진국이라는데, 이런 기회에 나도 한번 ‘휘슬’을 불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서다.
따라서 내 의견에 오류가 있으면 김교수는 물론이고, 누구라도 나서서 발언을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 그걸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출연한 <산허구리>는 (내 견해로는) 정치보다는 외려 ‘경제적’ 측면이 더 부각되어 있다. 아버지인 내가 아들인 ‘석이’에게 ‘차라리 철공소에 들어갈 것’을 권한다. 또 기계화된 ‘발동기’를 단 일본 배에 대항하기 힘든 현실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그 당시 일제의 검열로 작가가 ‘정치’를 다루기 힘든 현실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인 함세덕이 모방했다는 씽의 <바다로 가는 기사들>이 전혀 정치냄새가 없는 작품인 것으로 미루어 그가 생존(삶)에 더 많은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게 사실일 것이다.
먼저 김미도교수의 공연평을 들어보기로 하자. 어미인 ‘처’는 바다에서 죽은 작은아들을 땅에 묻겠다면서 이런 ‘넋두리(독백)’을 한다.
“봄가을 꽂이 피거든 복조 생각하고 목 놓아 울어주지. 서러울 것이 도무지 없어. 뭐이 서러워, 사나이 물에서 죽은 것이 소원이지. 너무 깊이 팠다가 샘이 솟아도 일 아니야. (잠깐 허공을 보더니) 오라, 물에서 자라다 물에서 살다 물에서 죽었으니까 땅속에 물 기운이 없어서는 못써” 이 독백을 인용한 김교수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런 부분(복조의 죽음)이 잘 살아났다면 1930년대의 어촌의 비극은 조금이라도 ‘세월호’의 비극과 오버랩 되었을 것이다. 함세덕이 아무리 일제 치하의 검열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라 해도 <산허구리>에는 당시 어촌 현실의 ‘구조적 모순’이 배어있다.
이런 현실은 비단 1930년대만의 사정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어촌과 농촌에서 직면하고 있는 ‘빈곤의 참상’이다. 죽도록 농사짓고 쌀값을 제대로 못 받아서 시위에 참가했다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고(故)백남기 농민의 현실에 다름 아닌 것이다.
(중략) ‘복조’의 누이 ‘분어미’가 남편도 없이 생계가 막연하여 결국 어린 분이를 업고 항구로 가겠다는 것은 또 다른 ‘이영녀’의 삶이고, 오늘날에도 ‘생계형 매춘’을 할 수밖에 없는 많은 여자들의 삶이다.
(중략) <산허구리>가 <바다로 가는 기사들>을 모방했으면서도 독창성이 반짝이는 부분은 바로 당대 한국의 현실을 투영한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1시간 남짓의 공연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80년 전의 한국 현실을 읽을 수 있었다는 명철한 평론가가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은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일단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라는 것이다. 왜? 지금 한국은 ‘빈곤의 참상’에 빠져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려 빈곤보다는 부유함에 의한 ‘분배의 불공정성’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단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룸으로 해서 그에 따른 사회적, 경제적으로 복잡한 ‘구조적 모순’이나 문제점을 잉태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80년 전의 함세덕이 살던 시기와는 ‘질이 다른’ 모순과 문제점을 잉태하고 있는 게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고 보여 진다. 영국의 브렉시트나 미국의 ‘트럼프의 당선’에서 보듯 선진국일수록 더욱 심각한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문제도 ‘선진국병’의 일종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김미도교수는 현재의 우리 사회를 일제 강점기 시대의 ‘빈곤의 참상’이라고 하니, 마치 70년대 북한의 ‘선전삐라’를 읽는 듯하다. 정말로 ‘과기대’ 교수인 김교수가 무역대국인 한국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인가? 혹시 자신이 ‘정치도그마’에 깊이 빠져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가를 묻고 싶다.
‘생존’을 도모하다 죽음을 맞은 일제 강점기의 ‘젊은 어부’와 ‘수학여행’가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어린 생명’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싶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백남기선생을 떠올려야 한다는 글에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백선생이 참가한 시위는 법원에서 ‘불법시위’라고 결론이 난 시위다. 지금 청와대 앞에서 국민들이 보여주는 ‘평화시위’와 견주어 얼마나 질이 다른 시위인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좌우간 쌀의 ‘과잉생산’으로 농민들이 어려움으로 겪는 우리의 현실에서 80년 전의 일제의 농민수탈의 비극을 떠올린다는 대학교수의 현실감각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고민스럽다.
최소한 지성을 갖춘 엘리트라면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자기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 아닐까! 마치 ‘최순실’에 의지해 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박대통령처럼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우리가 이번 사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아닐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치도그마’

분명 ‘세월호’에는 커다란 구조적 문제가 존재한다. 사이비종교의 이익 추구가 도사리고 있고, 또 그곳에는 도망친 선장도 존재한다. 구태의연한 정부의 무능과 리더십 등 한국적 천박한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과 선장의 나만 살고보자는 ‘이기주의’까지 한국적 현실모순이 모두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하지만 80년 전, ‘복조’가 살던 그 시절에 ‘해경’은 없었을지라도 (작품에서 여동생인 복실이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로는 최고수준의 리더들이 선단을 이끌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니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는 장면에서 ‘세월호’와 같은 사회성의 구조적 모순을 찾기 힘들다.
거기다 살아난 어부들이 복조의 죽음이 불가항력적인 기상재해(천재지변)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산허구리>에는 세월호의 ‘대통령의 7시간’처럼 정치적으로 쟁점이 될 게 없다.
그런데 김교수의 상상력은 <산허구리>에서 ‘세월호’의 비극이 오버랩 된다고 하는데, 나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따라서 김교수는 어떻게 ‘오버랩’이 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기 바란다.
또 농촌의 현실만 해도 그렇다. 나는 신문에 “영역확장에 나선 ‘천덕꾸러기’ 쌀”이라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기사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완구업체가 어린이 장난감을 쌀로 ‘무공해’ 장난감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국산 현미로 ‘강아지사료’를 만들어 판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쌀로 설탕을 개발했으며, 쌀로 여성들의 화장품의 개발에도 매진하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면서 날로 줄어드는 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각종 제품들로 쌀의 이용이 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는 전문가의 코멘트가 실려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쌀을 ‘천덕꾸러기’라고 칭한 것일 거다. 옛날에는 쌀이 부족해, 학생들에게 보리밥 도시락을 권장하고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도록 강제한 적도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김교수는 이런 현실에서 일제로부터 갈취당해 쌀밥을 구경하기 힘들던 80년 전의 현실과 어떻게 오버랩 시킬 수 있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되레 산업화로 인한 ‘구조적 모순’이 오늘의 현실에 존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지를 묻고 싶다.

1. 일단 한국의 쌀농사는 (경제적 측면에서) 국제적인 경쟁력이 없단다. 한국 쌀의 생산원가가 미국의 10배, 중국의 3배 정도 된다고 들었는데,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 수지에 맞게 한국 쌀을 수출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산물’ 위주의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로 인해 ‘FTA’가 절실하고, 이로 인해 농업이 소외된 부분이 (외국쌀의 수입 등) 있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바로는 그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2. 또 국민들의 식생활 개선으로 인해 ‘내수시장’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게 쌀이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다이어트’로 인해 쌀이 소비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를 안타까워한다면 김교수부터 열심히 세끼를 쌀밥으로 먹어 살을 찌워야 할 것이다.

3. 요사이 젊은이들의 ‘귀농’으로, 그들에 의한 과학적 영농으로 (특수작물과 기능성 쌀의 품종개발에 의한) 억대의 년 수입을 얻고 있는 작농가가 적지 않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그들은 농사일이 바빠서 시위현장에 나갈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4. 재벌들에 의한 획기적인 영농의 개선책을 내놓아 국제경쟁력을 높이려 해도 쌀농사까지 재벌이 다 해먹으려 한다는 여론에 밀려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5. 지금 쌀의 과잉생산으로 일 년에 쌀을 보관하는 비용만 해도 60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고령화된 농촌에서 농사일마저도 없으면 사회문제가 야기 될까봐 말도 못하는 형편이란다. 우선 선거의 득표 때문에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가격경쟁력은 없어도 영농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게 우리의 현실일 것이다. 물론 쌀농사가 ‘안보’와도 직결된 측면도 없지 않아 생산을 중지시킬 수도 없다고 한다. 전쟁이 나면 그나마 쌀을 수입해 올 수도 없으니 쌀농사가 중요한 안보가 되는 게 현실일 것이다.
이게 대체로 내가 알고 있는 한국농정에 대한 지식들이다. 이런 면에서 지금의 ‘한국연극’과 ‘한국농촌’은 많이 닮아있다. 둘 다 ‘수출’도 ‘내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김미도교수의 진보이론에 입각한 농촌현실의 타개책을 듣고 싶다. 나름 정치권으로부터 학습된 많은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론은 ‘한국연극’에도 필히 도움이 될 것이니, 김교수가 알고 있는 좋은 타개책을 제시해주면 연극판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에 ‘생계형 매춘’이 많다고?

잘 알다시피, 나는 1987년 연극 ‘매춘’을 기획한 사람이다. 그 당시 나는 ‘생계형 매춘’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쨌든 IMF이전이라) 한국이 유사 이래 최대의 경제적 호황을 누리던 때여서 누구도 그런 용어를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도 일자리가 없는 건 아니다. 각자의 수준에 맞는 고급 일자리가 없을 뿐이다. 우리 주변의 식당이나 개인집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가사도우미는 전부가 다 외국인이다. 특히 중국동포들이 많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 아파트에서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도 거의 다 그들인 게 현실이다.
이런 와중에 ‘생계형 매춘’이라는 말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자칫 인권침해가 될 우려가 있어 여기서 그만 두겠다.
그럼 <산허구리>를 보자. (너무나 분명히) 집을 떠나는 ‘분이어미’를 향해 아버지가 뒤에 대고 이렇게 외친다. “왜? 과부수절하기가 싫으냐!” 함세덕도 집을 나서는 딸을 향해 그녀의 가출이 꼭 ‘생계형’이 아님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그런데 80년 후의 경제대국에서 ‘생계형 매춘’이라니?
좌우간 ‘생계형 매춘’을 진보엘리트들은 어떻게 설명하는지 듣고 싶고, 또 알고 싶다. 김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연극배우가 영화나 TV에 가서 돈을 벌면 ‘생계형 배우’고, 연극을 하면 ‘예술형 배우’가 된다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정치도그마’가 두려운가?

한마디로 현재 ‘정치색’이 연극창조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현재 지나친 정치색으로 한국연극이 ‘목적극’으로 비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나. 오늘날 ‘한국연극’이 잉태한 문제점의 근원은 ‘남북분단’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함세덕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그에게 ‘월북’이라는 현실 자체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한국연극이 얼마나 풍성해져 있을까! 이처럼 초라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 많은 월북 연극인들이 북한에 가서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대부분이 그곳에서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숙청당한 게 현실이다. 이처럼 정치란 ‘허무’를 동반한다.

둘, 일단 예술가는 ‘종교’나 ‘정치’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양산된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현재 러시아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셋, 지금 우리 연극계가 현 우파정부의 ‘블랙리스트’를 성토하지만 지난 좌파정부에서의 편향된 정책이나 인사(人事)는 없었는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이런 악순환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나마 개헌마저 없다면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편향이나 보복’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시금 문체부와 그 산하에 ‘인사태풍’이 몰아치고 그 영향이 문화계를 또 다시 휘몰아칠 것이다. 국민들이 왜 문체부의 해체를 원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해서 <산허구리>에 정치사회적 ‘상상력’을 불어넣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김미도교수가 원하는 상상력은 (나의 관점에서) 연극공연에 지나치게 정치색(진영논리)을 강요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보는 사람이 나다. 김교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가?

 

한국정치는 4류인가?

어느 해 삼성의 이건희회장이 이런 말을 해서 크게 곤욕을 치렀다. “경제(기업가)는 2류고 관료(공무원)는 3류, 정치(정치가)는 4류다” 좌우간 이번 ‘최순실 사태’로 인해 한국정치가 4류라는 게 분명해졌다.
그런데 그런 4류들과 놀아나면 5류가 되는 게 아닌가? 자기 논리나 판단이 없이 그들의 논리를 그대로 입에 올리면 ‘컨펌 받는’ 박근혜대통령과 무엇이 다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산허구리>를 통해서 내가 일반 관객들로부터 들은 ‘감상평’은 김미도교수의 그것과는 달랐다. “저런 극심한 세상을 거쳐서 오늘날에 이른 한국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울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석이의 마지막 대사 ‘신작로를 걸으면서 왜 우리가 이렇게 사는가를 생각해 볼거야’ 이 대사를 듣고 요사이 중국과 미국, 일본과 러시아라는 강대국들이 우리의 통일을 방해하는 여러 모습들을 목격하면서 많은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소국인 우리를 어떻게 강소(强小)국으로 만들 것인가를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요즘 ‘부역자(附逆者)’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부역자란 ‘국가의 반역된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자’를 일컫는 말이라 한다. 이는 잘못된 정파에 동조하거나 가담해 국가에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정치에 줄을 서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 리더십의 위기, 우리는?

지금 신문을 들여다보면, ‘중견의 여기자들’이 한국남성들의 여성혐오증에 대해 긴 장탄식을 늘어놓고 있는 게 눈에 띤다. 주변 사람들이 서슴없이 “앞으로 여자 대통령은 뽑으면 안 돼.” “앞으로 백년 이백년 동안 여성 지도자는 나오기 힘들 거야” 이런 식으로 ‘여성폄하’를 거침없이 내뱉어 너무 듣기 거북하다고 자기들의 칼럼에 쓰고 있다.
요즘 박대통령을 등에 업은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 바로 한국의 여성엘리트들일 것이다. 거기다 더욱 국민의 분노를 촉발시킨 게 다름 아닌 여자대학인 ‘이화여대’여서 더욱 그럴 것이다.
거기다 제1야당의 추미애 대표까지 연일 ‘똥볼을 찬다는’ 조롱을 정치판에서 받고 있으니, 요즘 여성엘리트들이 얼굴을 들기 힘들 것이다. 실제로 교사, 법조계, 매스컴 종사자, 문화예술계 등에서 여성이 수적으로도 압도하고 있는 게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
특히 문화예술계는 실질적인 면에서 ‘여성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성인력이 중추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문화예술계도 이제는 여성리더십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연극계는 어떠한가? 이 기회에 한번 깊이 생각을 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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