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VE] 김창화의 연극세상(2016.01-12, 2017-01)

***이 글들은 월간  <THE MOVE>에 게재되었습니다.

 

김창화의 연극세상 2016년 1월-12월

 

(1월) 사라져가는 소극장들
(2월) 사랑하면서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사람에 대한 부끄러움을 담은 연극
(3월) 386세대의 ‘기억’에 관한 연극
(4월)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연극 : “까뮈의 뜨거운 겨울”
(5월) 세월호 참사 2주기를 기념하기 위한 공연 : “그녀를 말해요”
(6월) 상처주고 위로받는 그 이름 – 가족: “만리향”
(7월) ‘짬뽕’같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기억
(8월) 죽음을 향해 느리게 다가가는 순례자의 여정
(9월)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연극 : 포스트드라마 연극
(10월) 한국의 소녀와 영국의 소년 : 청소년의 소외와 고립
(11월) 죽음을 향해 느리게 다가가는 순례자의 여정
(12월) 집단과 개인의 대립 : 대한민국과 ‘파란 나라’

 


사라져가는 소극장들

 

2015년 한 해 동안, 연극계는 메르스 확산의 여파로, 그리고 9월부터 시작된 예술 검열의 후유증으로, 매우 어려운 한 해를 보냈다.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970년대 소극장 운동을 이끌어왔던 40년 역사의,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이 지난 10월 폐관했고, 이보다 먼저, 상상 아트홀과 대학로 극장이 문을 닫았다. 관객들이 흥미 위주의 공연에 몰리고, 건물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워, 연극인들은 하나, 둘 그들의 보금자리였던, 극장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대학로가 끝나고, 성북동이 시작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던, 극단 ‘성북동 비둘기’의 소극장 ‘연극 실험실 일상 지하’도 지난 5년간의 활동을 접고, 올 해 말, 문을 닫게 됐다.
거친 콘크리트 천장과 기둥, 시멘트바닥이 그냥 드러난 지하실인 ‘연극실험실 일상지하’는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고, 환상을 자극하는 조명시설을 갖추지 않은, 민 낯 그대로의 공간이며, 일상 그대로의 상황을 연극적 조건으로 전환하는 실험을 통해, 창작희곡과 번역 희곡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기존 형식과 충돌하는 새로운 표현양식을 선보여 왔던 공간이다. 이 공간의 마지막 작품이 될, 장 쥬네 원작, 김현탁 재창작, 연출의 “하녀들”이 지난 12월 1일부터 27일까지 김미옥(마담역), 이송희(끌레르역), 조서희(쏠랑쥬역)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공연 시작 5분전에 관객을 입장시킨, 이번 공연은, 검은색 접이식 의자로 가득 채운 지하 공간에, 맨 뒤 세 줄만 객석으로 이용하고, 나머지 객석은 무대로 활용하는, 대담한 공간연출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프랑스인의 죄의식과 밤의 세계, 범죄 심리, 혹은 비정상적인 것의 이면적 의미와 가치에 흥미를 가진 장 쥬네는, 사실주의 연극의 형식과 바탕을 이용해, 초현실주의적 내용을 전달하는 특이한 이력과 경력의 작가로 잘 알려졌다. 이 작품은 특히, 마담의 장식적인 삶과 두 하녀의 정신적 억압, 숨은 욕망의 분출, 억압에 대한 비 저항적 상황, 즉 억압은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지, 결코 외부적 힘에 의해 억압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작가의 주장이 담긴 희곡으로, 장 쥬네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공연되는 희곡이다.
검은 색 철제구조의 프레임이 프로시니움 아치의 형태를 유지하고, 단 두 개의 스쿠프 조명기만을 이용한 김현탁 연출의 “하녀들”은, 원작의 상황에서, 두 하녀의 마담에 대한 적개심과 불안, 공포에 초점을 맞추어, 마담을 죽이겠다는 의지와 그 행위의 실천에 집중했으며, 마담을 프랑스의 여인이 아니라, 한국의 부유한 계층의 부인, 사회적 공감대가 부족한 강남의 특정 계층의 여인으로 변형시켜, 장 쥬네의 “하녀들”과 한국적 리얼리티의 접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관객이 입장하기 전부터 끌레르와 쏠랑쥬를 객석에 앉게 해, 극장 바깥의 공간과 극장 안의 공간을 연결시키는 연출을 했다. 두 하녀의 거친 호흡과 극도로 불안한 심리상태로 시작된 이 공연은, 마담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두 하녀의 이해할 수 없는 갈등과 다툼으로 이어졌다. 원작에서도, 이 두 하녀의 부닥침은 이 연극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알려졌다. 즉 위로부터의 억압과 폭력이 예감되면, 수평적 관계에 놓인, 피 억압자들 사이에서 분란이 생기고, 싸움이 벌어진다는 사회 심리적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원래 장 쥬네는 이 작품의 모티브를 범죄자의 내면적 심리상태에서 찾아냈으며, 두 하녀의 마담에 대한 살해의 동기와 의지를, 자신들이 마담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무시당했으며, 억압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인과응보의 원리뿐 아니라, 사회적 충돌과 갈등, 즉 하녀와 마담의 직업적 관계, 신분의 차이에 대한 불만과 마담과 같은 지위와 쾌락을 향유하기 위한 범죄적 욕구와 여인으로서의 본능적 충동이 마담의 여성성과 부닥치게 된다는 사실도 포함하고 있다. 김현탁 연출의 “하녀들”은 피로 얼룩진 바닥에서, 불안에 떠는 두 하녀의 극도로 긴장된 상황에서 연극을 시작해, 마담이 아니라, 끌레르의 죽음으로 이 연극의 매듭을 지었다. 즉 살인에 대한 가상적 상황이 이 연극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였다면, 김현탁 연출의 “하녀들”은 살인에 대한 동기와 그 배경의 심리적 과정을 더 충실하게 표현했으며, 마담에 대한 살인의 의지가 실현되지 못한 상황에서, 쏠랑쥬가 끌레르를 죽이는 극단적인 작가의 선택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글은 세상을 움직이는 문화예술전문지 월간 <THE MOVE> 2016년 1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사랑하면서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사람에 대한 부끄러움을 담은 연극

 

2015년 제15회 ‘이인극 페스티벌’에서 작품상과 연기상(은진역 신소현)을 받은 극단 ‘M. Factory’의 “진홍빛 소녀”가 2014년 14회 이인극 페스티벌에서 희곡상을 수상한 “잠수괴물”과 함께, 지난 1월 5일부터 17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3관에서 막을 올렸다. 2월 25일부터 3월 5일까지 청담동 유시어터에서의 재공연도 계획하고 있다.
극단의 대표인 한민규가 쓰고, 이지수가 연출한 “잠수괴물”과 “진홍빛 소녀”는 2012년에 창단한 극단 ‘M. Factory 공연예술 창작소’가 지난 3년간 모두 7차례의 공연을 하면서 이룬 성과이며, 창작콘텐츠 개발을 목표로 설립된 극단의 면모를 아주 잘 드러내는 공연이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이혁(나경민, 김형균 역)과 최은진 (신소현 역)의 사랑과 욕망, 도덕적 책임과 회피의 순환적 구조를 플래쉬 백 (flash back) 기법으로 묘사한, “진홍빛 소녀”는 피해자와 방관자의 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역전시킨 드라마이며, 추리적 기법과 논증적 전개가 매우 급박하게 진행되는, 미스터리물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이혁은, 15년 전, 51명의 사상자를 낸 방화사건의 범인으로 무기징역을 살고 있던, 최은진이 잠시의 휴가 중에 자신의 집에 몰래 침입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조금 전 강의에서, 방관자도 죄가 있음을 역설하던 그가, 은진에 의해, 방화사건의 주범 이였음이 밝혀지는, “진홍빛 소녀”는, 고아원 원장에게 성 추행을 당하고 있는 은진을 다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소유했던, 이혁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미스터리에 빠져들게 된다. 은진은 이혁에게 지금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면서, 새벽 4시까지, 이혁이 답을 맞히지 못하면, 트렁크에 담아 둔 이혁의 어린 딸을 불에 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어린 시절 함께 고아원에 있다가, 자신을 버린 어머니가 다시 찾아와, 고아원에서 풀려난 이혁과 계속해서 고아원에서 원장의 성폭력을 견디며, 쓰레기처럼 살아야했던 은진. 그 은진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웠던 이혁. 그리고 이혁의 부주의로 고아원에 불이 나고, 이제 더 이상 고아원 원아의 명단에 없었던 이혁에게는 아무런 의혹이 남겨지지 않았고, 유일한 생존자인 최은진만이 방화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하던 중, 잠시 휴가를 얻어, 이혁의 집에 몰래 침입해, 이혁의 어린 딸을 미끼로 이혁을 위협한다는 것이 “진홍빛 소녀”의 기본 줄거리다.
이 공연이 작품상을 받은 가장 큰 원인으로는, 트렁크에서 가냘프게 들리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통해, 관객은 그 큰 트렁크에 이혁의 어린 딸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극의 결말부에 이혁은 그 트렁크를 열어, 자신의 딸이 그 속에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즉 최은진은 처음부터, 이혁의 실제 딸을 인질로 삼지 않은 것이다. 은진의 이러한 허구적 설정과 실질적 위협에 대한 극적 장치는, 소품으로 삼은 낡고, 큰 트렁크를 활용한 연출의 기법과 함께, 십대에서 삼십대의 중년여성으로 성숙한 최은진의 형편없이 일그러진 삶을, 매우 담담하게, 때로는 몽유병자처럼, 유연하면서도 절절하게 표현한 최은진역의 신소현이 보여준 연기력의 힘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커튼콜에서 배우 신소현은 작은 목소리로, 거의 혀끝에서 맴도는 소리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객석에는 배우 신소현의 최은진역은 마지막 커튼콜까지 이어지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무대 위에서의 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다 보면, 때로 공연이 끝나고도 그 여운과 잔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또 자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다 지켜주지 못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얼마나 큰 부끄러움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진홍빛 소녀”는 사랑하면서도 지켜주지 못한 사람에 대한 작은 부끄러움을 담은 연극이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은 ‘배신’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글은 세상을 움직이는 문화예술전문지 월간 <THE MOVE> 2016년 2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386세대의 ‘기억’에 관한 연극

 

대한민국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나라다. 그리고 아직까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분단국가다. 복잡한 과거의 역사와 더 형편없이 엉켜버린 현재의 혼란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이며, 아픔과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좌와 우로 나뉘어서, 진영논리로 살고, 세대 간의 차이와 연령별 구분, 학력의 차이, 지역의 차이를 분명히 다르게 구분해서 사는, 그래서 국민 모두가, 각기 다른 체험과 성향을 지니고 살아가는, 매우 복합적인 구조와 기질을 지닌 민족이다.
백하룡 작, 전인철 연출의 “고제”는, ‘386’세대의 기억에 관한 연극이며, 실제로는 경상남도 거창군에 있는 마을이름이며, 동시에 ‘하늘로 가는 높은 사다리’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작가는 말한다. 1990년대 초반, 전교조 사태와 강경대의 죽음.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분신자실을 하면서, 정치적 시위에 참여했던 시절, 그 시대 젊은이들의 시리도록 아픈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이 바로 “고제”다. 그들의 사랑과 투쟁, 그들의 기억과 그들이 부닥쳐, 극복해야만 했던 현실. 과거의 운동권 학생들이 이제는 정치판의 능구렁이가 되어, 나름대로 한 몫을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룸살롱을 운영하거나, 오랜만에 만난 선배 누나와 못 다한 사랑을 나누고,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 채, 막연한 그리움과 ‘회귀욕구’에 잠겨,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꿈꾸는, 혹은 그 과거를 열심히 기억해 내고자 하나, 그 과거는 각기 다른 파편으로 흩어져,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조작된 과거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그런 연극이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천성과 기질이 풍부한 작가 백하룡이 각기 다른 관점과 시각으로 재구성해 낸, 이십년 전의 그 민박집에서의 사건과 기억들. 이십년 만에 다시 현재의 나(안병식 역)를 찾아온 현재의 여진 (배해선 역). 과거의 현수(권일 역)를 중심으로 두 사람의 기억은 서로 다른 이야기와 층위를 지니게 되고, 과거의 여진 (김정민 역)이 사랑했던 과거의 나 (김주완 역)는 지금의 나와 얼마나, 어떻게 다른가? 이십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달라진 과거와 현재의 나,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여진. 이렇게 “고제”는 ‘하늘로 가는 높은 사다리’라는 상징처럼,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청춘들의 기억을 통해, 순수했던 삶의 한 순간이, 외부의 힘에 의해, 부서지고 무너져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무대 한 가운데에 넓은 평상처럼 무대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흰색의 나무가 뿌리를 하늘로 뻗은 채 매달려있는, 이윤수 무대디자이너의 뒤집어진 나무의 공간에 대한 콘셉트가 아주 흥미로웠으며,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들이 무대 구석구석에서, 불쑥, 갑자기, 꿈처럼, 그리움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처럼 나타나게 만드는 전인철 연출의 동시다발적이고, 구조적인 연출방식도 아주 흥미로웠다.
‘386’세대가 아닌 다른 세대에게 이 연극은 혹, 1990년대에는 30대로 살았던, 1980년대에 대학에 들어간 1960년대에 출생한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삶에 대한 ‘후회스러운 기억’으로 읽혀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그들이 지금 안정되고 행복한 세대는 아닐지라도, 후회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다. 과거와 달리, 받아들여야 할 것, 체념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겠지만. 사실 지금 대한민국의 50대가 바로 그들이며, 그들의 뜨거웠던 삶이, 투쟁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이 연극은 과거에 대한 장밋빛 기억을 드러내고자 하는 연극이 아니다. 과거의 상처와 지금도 아물지 않고 흔적으로 남아있는, 과거, 그 순수의 시대에 대한 뜨거운 열망, 아직 식지 않는 열정을 암시하고 있는 연극이다. 그러나 ‘기억’에 관한 연극인 “고제”는, 단절된 과거에 대한 기억을 다루는 연극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기억의 ‘발효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이제 그 과거의 인물들은 과거와 단절된 채,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위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때 해결되지 않은 이런 문제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그 ‘과거’는 유효하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과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관점에 따라, 그 ‘과거’는 이렇게 보일 수도 있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하룡 작, 전인철 연출의 “고제”는 ‘과거’를 다루고 있으나, 현재에도 ‘유효한’ 과거의 기억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관해, 이 작품이 던졌던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 대한민국의 혼란과 혼동을 바로잡을 수 있다.
(이 글은 세상을 움직이는 문화예술전문지 월간 <THE MOVE> 2016년 3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연극 : “까뮈의 뜨거운 겨울”

 

‘현실에 굳게 발을 딛고, 땅 끝까지 간다.’라는 의미의 ‘From Earth To Earth’의 약자인 극단 ‘페테(FETE)’는 2002년에 창단된 공연예술단체다. 그동안 이미 13편 이상의 연극을 공연한 이 단체의 대표는 백훈기며, 1951년에 발표된 알베르 까뮈의 “정의의 사람들”을 원본으로 삼아, 각색한 공연, “까뮈의 뜨거운 겨울”의 드라마트루그를 맡았다. 지난 3월 16일부터 27일까지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한 이 작품의 연출은 2005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김원익이 맡았다. 고통스럽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복을 전할 수 있을까를 고심해 봤다는 김원익 연출은 이미 2014년에 스스로 쓰고 연출한 “노크”라는 작품으로 활동을 시작한, 젊은 그룹의 연극인이며, 이번 공연을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와 연계해서 직접 각색하기도 했다.
김원익 연출은 까뮈의 원작에서는, ‘이반 카리아예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시인이며, 동시에 1905년 러시아 사회주의 테러리스트에 신입당원으로 가담하여, 실제 러시아 대공의 암살에 가담한 인물을, ‘야네크(남수현 역)’라는 등장인물로 바꾸어 연출했으며, 원작에서는 매우 복잡한 인물인 경시총감 ‘스쿠라토프(나종민 역)’를 아주 희화적인 인물로 재탄생시켰다.
이번 공연의 핵심적인 사건은 ‘야네크’가 대공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지기로 계획했던 첫 번째 모의에서, ‘야네크’가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어린아이들 때문에, 대공 암살 계획을 포기하고, ‘야네크’의 이런 비 혁명적인 태도에 ‘스테판 페도로브(김한결 역)’가 격분하여, ‘야네크’를 비난하는 장면이다. 혁명의 완성을 위한 테러리스트의 활동과 시인 ‘야네크’의 어린아이에 대한 배려는 서로 상충하는 가치관이며, 혁명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직접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까뮈의 이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구분되는, 그의 사회주의적 경향성과 분리되는, 인본주의적 관점이며, 그 관점의 변화가 1951년 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에 나타난 실존주의 문학이 이룩한,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1913년 알제리에서 출생한 까뮈는, 이 작품의 후반에, 새로운 반전을 남긴다. 대공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리스트들의 두 번째 시도가 모의되고, ‘야네크’는 한 번 더, 폭탄을 던질 기회를 얻게 된다. ‘야네크’를 사랑하던 여당원 ‘도라 둘르보브(류진 역)’의 신뢰와 공감으로 얻게 된 이 기회를 ‘야네크’는 성공으로 마무리하고,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에서 ‘야네크’는 의외에도 죽은 대공의 부인 ‘미셀(이초롱 역)’을 만나게 되며, ‘야네크’가 대공을 암살한 사실을 후회한다면, 사면을 요청하겠다는 제안을 받게 된다. 즉 기독교적인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 ‘야네크’의 불완전한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까뮈의 선택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남아있는 테러리스트들이 영원히, 계속해서, 새로운 테러를 모의하고, 행동하도록, ‘야네크’ 스스로 죽음을 택하도록 결정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다시, 국가나 교회와 같은 집단적인 권력 혹은 힘에 맞서서 저항하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모순되는 것 같은, 두 개의 가치관이 존재하는 이 작품은, 까뮈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쉽게 읽혀지는 희곡은 아니다. 그래서 공연하기도 쉽지가 않다. 극단 ‘페테’는 두 시간이 넘는 원작을 충실하게 잘 전달했으며, 류진, 최홍준, 김한결, 남수현, 이초롱의 뛰어난 연기력과 나종민, 이기문의 훌륭한 연기협력이 받침이 되어, 원작의 의미와 가치가 충분히 잘 전달되는 공연을 만들어냈다. 혜화동 1번지의 그 좁은 공간에서, 이번 공연에 참가한 8명의 젊은이들은, 열과 성을 다했고, 그들의 빛나는 모습들이 백 년 전 러시아의 진실을, 50년 전 프랑스의 지성을, 무대 위로 가져와, 이 어둡고 우울한 서울의 거리를 아름답게 밝혔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인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이 글은 세상을 움직이는 문화예술전문지 월간 <THE MOVE> 2016년 4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기념하기 위한 공연 : “그녀를 말해요”

 

2014년 4월 16일, 295명의 희생자와 9명의 실종자를 남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벌서 2년이 지났다. 남산예술센터는 2016년 시즌프로그램으로 주제기획전 <귀국전>을 열었다. 해외에서 화려하게 금의환향한 연극인을 대상으로 하는 ‘귀국전’이 아니라, 한때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귀국전’의 타이틀을, 존재하지는 않지만, 유령처럼, 혹은 망령처럼 붙어 다니는, 정치사찰의 현재진행형을 경고하기 위해, 다시 차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적인 골방에서, 허름한 연습실에서, 작은 소극장에서, 세상의 후미진 골목길에서 바라본 ‘헬 조선’, 조국에 관한 이야기를 ‘귀국전’에 모았다.
‘귀국전’에 출품한 세 작품 가운데 세월호 참사의 2주기 일정과 겹친 지난 4월 14일부터 17일까지 공연한, 이경성 작, 구성, 연출의 “그녀를 말해요”는 지난해 “비포 애프터”라는 공연을 통해, 세월호 사건과 삶의 관계를 살펴보았던 이경성 연출이,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엄마들을 만나, 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죽은 딸의 실존을, 그 실존의 이미지와 남은 가족의 슬픔을 공연의 형식으로 무대화 하는, ‘기록극’의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그녀를 말해요”의 공연은 지난 해 “비포 애프터”와는 다르게, 기록한다는 것과 기억한다는 것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사실과 기억의 혼용된 몽타주로 읽혀졌다. 그래서 세월호에 대한 기록보다는 기억에 가까운 관점이 주를 이루었으며, 사실에 대한 거리두기 보다는 사실 속으로 뛰어들어, 사실과 허구의 구분이 불가능한 영역까지 달려간 공연이었다. 최요한, 나경민, 우범진, 이렇게 세 명의 남자배우와 장수진, 성수연, 두 명의 여자배우가 등장하는 “그녀를 말해요”는, 딸에 대한 기억을 얘기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 서사적 서술형 공연이다. 최요한, 우범진 두 남배우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배우는 이미 지난 해 “비포 애프터”에 출연했던 배우들이다. 다섯 명의 배우들이 무대 위에 놓인 다섯 개의 의자에 앉아, 혹은 일어서서, 작은 움직임과 함께, 딸을 잃은 엄마들과 만났던 순간, 그들에 대한 첫 인상, 사소한 기억들. 그래서 더 마음이 쓰린 작은 에피소드들을 섬세하게 연결하고, 엮고, 조합한 초반부의 서술형 공연은 일상적인 그들의 삶과 그들의 죽은 딸에 대한 기억이 다시 살아 오르는 순간들이다. 그래서 현실은, 그들의 기억은, 사실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말해요’라는 말은 참으로 어색한 표현법이다. 우리말에 그녀라는 지시대명사는 자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인 그 젊은 영혼들에 관해 말하기를 공연의 형식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면, ‘그들에 대해 말해요’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아무튼 서술형 장면이 지나고, 영상을 사용해서, 피켓과 함께 침묵의 시위를 하는 장면에서는, 지금 우리 사회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과 어떻게 마주치고 있고, 진상규명을 위한 희생자 가족들의 요구에 어떤 냉담함과 무관심, 방임이 가로막고 있는지 잘 드러내 주었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압도적인 부분은, 지난 해 “비포 애프터”공연으로 연기상을 받은 성수연이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이름을 무대 위에서 한 명씩 불러내는 장면이다. 그 많은 이름을 어떻게 다 외웠을까? 정말 엄청난 노력과 집중력이 필요한 장면이다. 그런데 비슷비슷한 이름을, 희생자들의 소속과 분류에 따라 정확하게 불러주는, 성수연 배우의 기억이 잠시 막히면, 무대에는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그 짧은 침묵에 무대 위에서 벌거벗은 채, 바다 속 시체처럼 뒹굴던 네 명의 배우들은 움직임을 멈춘다. 성수연 배우의 기억에서 그 이름이 되 살아나면, 무대 위의 배우들은 다시 뒹군다.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 부르다가 내가 죽을 그 이름들을 무대에서 불러내는 이 장면은 연극도 아니고, 흥미롭지도 않다. 그러나 이 시절 우리가 기억해야할 세월호 희생자들의 이름이다. 그 이름 하나 하나가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노란 리본으로 매달려 있고, 비록 삼 일간 단 3회의 공연에서 불린 이름이지만, 역사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이름이고, 우리가 기억하고 부르지 않으면 잊힐 이름들이다.
(이 글은 세상을 움직이는 문화예술전문지 월간 <THE MOVE> 2016년 5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상처주고 위로받는 그 이름 – 가족
“만리향”

 

2014년 제 34회 서울연극제에서 대상, 연출상, 신인연기상, 희곡상을 수상하고, 2015년에는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 지원 사업으로 선정된 김원 작, 정범철 연출의 “만리향”이 지난 5월4일부터 6월 12일까지 대학로 SH아트홀 무대에 올랐다.
이 연극은 ‘먹고 살기 위해 아우성’치던 시대의 연극이 아니라, 이제는 먹고 살만해지니까,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내,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받았던 가족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서로를 힐링하기 위한 수단을 찾아가기 위한 공연이다. 집 나간 막내를 잊지 못해, 매일 집을 나가겠다는 어머니(김효숙 역)를 위해, 한바탕 가짜 ‘굿판’을 벌리는 “만리향”은 근래 우리 연극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휴먼가족 코미디이며, 작가의 언어감각이 아주 뛰어난, 토종 연극이다. 즉 동시대 한국인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가족’이라는 함수를 풀어내기 위해, 과거와 현재의 기억을 최대한 활용해, 그동안 잊혔던 관계의 새로운 회복을 시도한 연극이기도 하다. 중국집 ‘만리향’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며, 이 연극에 등장하는 ‘만리향’은 중국집이지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보편적 서민의 식당이며, 보통사람들의 삶과 생존이 직결된 장소다. 그 식당의 주인이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버지 대신 주방을 맡았던 둘째 (권오중 역)는 오래전에 가출해, 유학까지 갔던 첫째 (장원영 역)가 지금 주방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물론 아내 (박성연 역)와 셋째 (최은경 역)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운영하고 있지만, 둘째가 보기에는, 형의 음식 만드는 솜씨가 형편없어서 고객들이 점차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첫째의 입장은, 그렇다면, 둘째가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 일을 하면 될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고, 둘째는 주방일은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주장이다. 연극의 시작은 어머니가 갑자기 오래전에 실종된 막내를 시장에서 봤다고 주장하시면서, 막내를 찾아 나가겠다는 폭탄과도 같은 선언을 하면서 전개된다. 셋째는 집 나간 둘째 오빠와 연락이 되어, 둘째 오빠를 불러들이고, 오랜만에 가족들의 재회가 이루어진다.
가족회의에서 어머니는 돼지 한 마리를 거뜬하게 들어 올리는 무당이 굿을 하면, 막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털어 놓는다. 그래서 과거에 유도선수로 활동했던 셋째의 친구 유숙(문학연 역)이가 물망에 오르고, 유숙이라면, 돼지 한 마리 (보통 180 킬로그램 정도)는 너끈하게 들어 올릴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물론 ‘굿판’에서 사용하는 돼지는 속을 다 비운, 무게가 조금은 덜 나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에 들어올리기에는 무거운 중량임에는 틀림없다. 돼지 한 마리를 들어 올릴 수 있는 무당이 굿을 해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가 제시한 조건이고, 그 조건에 맞추어,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가짜 굿판을 만들어줄 셋째의 친구 유숙을 초대해야 하는 것이 이 연극에 참여하고 있는 가족들의 ‘미션’이다. 그래서 “만리향”공연의 모든 인쇄물에는 웃고 있는 돼지 한 마리가 통째로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것이다. 셋째의 친구인 유숙은 셋째와의 시합에서 져, 유도선수로의 꿈을 접었고, 또 과거에 첫째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내가 있는 첫째의 부탁을 들어 줄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래서 궁리 끝에 이들은 첫째의 아내가 도망갔다는 거짓말로 유숙을 설득해, 굿판을 벌리게 된다. 시어머니 모시고 병원에 다녀온 사이에, 도망간 며느리가 된 첫째의 부인을 굿판에서 멀리 숨겨 놓은 채, 굿판은 진행되고, 가짜 굿판의 영험한 도움으로, 어머니는 비로소 막내의 죽음을 인정하고, 막내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내의 죽음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굿판을 통해, 가족 간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한 의도가 애초부터 있었다. 사실 이 집안의 골칫거리인 둘째는 이 집안의 가족이 아니라, 밖에서 데리고 온 자식이었다. 아버지의 친구가 일본인 여자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을 이 집에 맡겨 놓았던 것이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첫째뿐이었다. 어머니의 소원으로 굿판을 벌리면서, 굿판에 집중했던 둘째는 자기 자신이 사실은 이 집안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음을 알면서도, 열심히 굿놀이에 참여했고, 무의식적으로, 같은 가족으로 행동했으며, 앞으로는 주방을 맡아 ‘만리향’을 부흥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힌다. 정신없는, 단순한 사람처럼 보이는 둘째의 행동과 판단, 자신과는 피붙이가 아님을 알면서도, 친동생 이상으로 둘째를 감싸주며 살아온 첫째, 그리고 시집을 못간 것인지, 안 간 것인지, 이 집안에 항상 붙어있던 셋째 남자친구의 갑작스러운 등장, 이렇게 오래 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몰랐던 가족들이, 가짜 굿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은 연극 “만리향”은 지금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을 매우 희화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희극은 비극보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크다.
(이 글은 세상을 움직이는 문화예술전문지 월간 <THE MOVE> 2016년 6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짬뽕’같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기억

 

19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으로 희생당한 수많은 영령들과 그들이 뒤에 남겨놓은 가족, 친지들이 보낸 세월이 벌써 36년이다. 광주의 문제는 정치적으로는 타협과 해결책을 제시했을지 모르지만,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직 상처이며, 고통스러운 기억이며, 풀리지 않은 응어리로 남아 있다. 2002년에 창단한 극단 ‘산(대표 윤정환)’이 2004년부터 윤정환 작, 연출의 “짬뽕”을 공연한지도 벌써 십년이 훨씬 넘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이후 36년, 극단 ‘산’의 초연 “짬뽕”공연 이후 12년이 되는 지난 6월 7일부터 26일까지 지하철 2호선 뚝섬역 부근에 있는 ‘성수 아트홀’에서 “짬뽕”이 다시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그동안 1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보고 간, 이 공연을 뒤늦게 보기 위해, 뚝섬역 6번 출구로 나왔다.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다는 ‘성수 아트홀’을 찾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대한민국이라는 엄청난 지층의 밑바닥에 위치한 중국집 주인 신작로(박주용 역)는 그렇게 5월의 봄을 고통스럽게 지나면서, 절름발이 여동생 지나 (김민선 역)를 잃고, 사랑하는 오미란(강수영역)과 동생처럼 아끼던 만식 (김조연 역)을 잃었습니다. 광주에서의 5월이 오기 전에 함께 소풍가서 찍은 사진 한 장만 달랑 남겨 놓은 채. 그래서 그는 이 ‘짬뽕’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또 그날이 왔구먼요. 오늘은 곳곳이 제삿날이요. 이놈의 봄만 되면 미쳐 불 갔어.”라고 외친다. 36년이 지나도, 그날이 오면, 미칠 것 같은 사람들은, 대한민국 곳곳에 넘치고 넘칠 것이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5월’이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지금, 아직도 이곳 대한민국에는, 그날 그곳에서의 함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외침으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다니는 철새 정치인들이 넘치고 넘친다. ‘광주’를 순례지처럼 둘러보고, 근엄한 표정을 짓는, 그들의 서툰 연기를 볼 때마다, 이 ‘짬뽕’같은 세상을 살아야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되살아나며, 역사는 그들의 희생에 과연 어떤 보상과 대답을 내 놓았는지에 대한 끝나지 않는 질문들이 쏟아진다.
윤정환이 쓰고, 연출한 “짬뽕”은 역사라는 거대한 관점으로 광주의 5월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을 살던, 가장 평범한 우리들의 이웃, 그들이 아무런 이유와 조건 없이 휘말려든, 그 ‘광기의 역사’, 근대화를 볼모로 삼았던, 군부 독재정권의 무절제하고도, 무책임한 ‘폭력!’, 그 잔혹한 학살의 현장을 기억하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구조였고, 장치였으며, 배경이었다.
봄이 오기를 기대하는 중국집 ‘춘래원’은 일상적인 대한민국의 공간이며, 서민들이 내일이라는 꿈을 설계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으는, 그렇게 미래를 만들어가는 삶의 현장이다. 그러나 1980년 5월, 광주는 이들에게 더 이상의 미래를 약속해 주지 않았다. 이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이유로 거대한 폭력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본능적으로, 폭력에 대한 저항을 시작했으며, 조직적인 힘에 의해 거세됐다.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간 이유를 작가는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포장했으나, 상상이 현실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래서 “짬뽕”에서 벌어진 일은 결코 ‘상상’이 아닌 것이다. 그날 광주에서는 우리들로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났고, 광주에서 일어난 일은 한동안 우리 국민들 모두에게 사실로 기록되지 못했다. 지금도 광주에서의 그 날의 기록을 ‘왜곡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세력’이 있고, 그래서 완벽한 ‘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윤정환 작, 연출의 “짬뽕”을 보면, 그 날 일어난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발전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광주의 비극을 다룬 여러 가지 공연물 가운데, 윤정환의 “짬뽕”이 주는 특별한 울림이 있다. 윤정환의 공연은 인생의 봄을 기다리는 소박한 한 남자의 꿈이 있고, 그 꿈이 깨어지고 난 다음, 지금의 고통을 달래주는 힘이 바로 꿈꾸던 시절의 애틋함과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기억이 파괴적으로 현재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어버리기 위해, 과거의 애틋한 그리움을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재생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래서 윤정환의 “짬뽕”은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공연이 아니라, 그 찬란한 ‘봄’을 기다리던 삶의 근원적인 그리움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공연으로 읽혀진다.
(이 글은 세상을 움직이는 문화예술전문지 월간 <THE MOVE> 2016년 7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죽음을 향해 느리게 다가가는 순례자의 여정

 

가톨릭 사제인 충현(김재건 역)은 은퇴 후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려한다. 그러나 30년 동안 오로지 충현신부님의 식복사(가톨릭 사제의 밥을 해주는 직책)로 일해 온 윤정(강애심 역)은 가족 이상의 존재인 충현을 그렇게 떠나보낼 수가 없어, 자전거에 수레를 달아서, 충현신부와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마치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800킬로미터에 달하는 순례자의 길을 연상시키는, 윤정과 충현의 자전거 여행은, 느리게, 느리게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김나영이 쓰고, 문삼화가 연출한 “밥”은 이렇게 오래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우리들에게 삶의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전했다.
김나영 작가가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는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노사제의 글 가운데, “죽음의 순간에 곁을 지켜줄 단 한사람만 있다면……”이라는 내용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과 피로서 세상을 구원했듯, 그래서 교회와 성당에서 ‘성체성사’를 통해, 그 의미를 의식적으로 반복하듯, 밥은 누군가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신과 함께 있지만,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제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는 젊은 윤정(조승연역)과 현재의 윤정을 통해 “밥”은 남을 구원하기 위해 평생을 살아온, 한 사제의 삶을 축복하고, 구원하기 위한, 순례의 행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두 사람의 관계와 느린 걸음은, 현실적으로는 엄청난 위협과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 수도원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여정을 준비하기 위한 거처를 찾고 있는 이들에게, 혼자 마을에서 살고 있는 박씨(현대철 역)는 나이든 윤정에게, 성상납을 요구한다. 마치 제주도에 전래되는 ‘살모설화’처럼, 윤정은 평생 지켜온 자신의 순결을 내던지며, 노사제인 충현의 건강과 안정을 위해, 박씨의 요구를 들어주고, 충현과의 마지막 시간을 갖는다. 박씨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들의 순수한 영혼을 감시하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자들이 이 둘의 여정을 뒤따라 이곳까지 왔는데, 이들은 방송 PD인 혜원(김지원 역)과 카메라 감독 성권(윤관우 역)이다. 노 사제와 윤정의 관계를 그렇고 그런 남녀관계로 밝히고 싶어 하는 이들의 본능은, 진실을 전하는 보도방송의 본질을 넘어서서, 화제를 모으고, 사람들의 쓸데없는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한, 저급한 저널리즘의 상징이다. 다행스럽게도, 카메라 감독 성권은 윤정의 진심을 알아차리고, 윤정과 사제의 진실한 관계를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박씨에 의해, 윤정의 성상납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충현신부와 윤정을 보호하는 기사도의 임무를 자청하게 된다. 결국 다큐멘터리 제작 PD인 혜원도 성권의 편에 서서, 박씨를 몰아낸다.
“밥”은 탄탄한 희곡적 구성과 함께, 연기, 연출의 조화와 호흡이 아주 잘 맞는 공연으로, 90분이라는 공연시간이 아주 짧게 느껴질 정도로 흡인력과 몰입도가 높은 공연이다. 지난 6월 24일부터 7월 24일까지 홍대입구역 2번 출구 부근에 있는 ‘가톨릭 청년회관 CY씨어터’에서 공연했는데, 장애인들을 위한 ‘배리어프리(Barrier Free)’ 공연으로, 청각장애자는 화면으로, 시각 장애인은 이어폰으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연극은 특정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계층이 즐길 수 있는 연극은 그렇게 많지 않다. 김나영 작, 문삼화 연출의 “밥”은 오랫동안 국립극단의 배우로 활약해 온 김재건이라는 뛰어난 배우와 함께, 세월이 지날수록 연기가 더 무르익어가는, 강애심이라는 감성도 높은 배우의 앙상블과 중년의 현대철, 김지원, 그리고 아직은 젊게 느껴지는, 그러나 결코 어리지 않은 조승연과 윤관우의 노력과 열정이 빛을 더해 매우 보편적이고, 동시에 감동이 넘치는 공연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죽음을 향해 느리게 다가가는 순례자들의 여정에 동참한 관객들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고령화에 관해, 그들의 고독과 바람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운 결과를 얻기 위한 노력과 희생, 봉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밥”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웃음 속에서, 나는 한국인의 넉넉함을 훔쳐본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그 여유로움은 우리민족이 겪어온 아픔 때문에 생겨난, 초월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이다.

(이 글은 세상을 움직이는 문화예술전문지 월간 <THE MOVE> 2016년 8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연극 : 포스트드라마 연극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연극학과에서, 연극 기호학의 대가인 에리카 피셔-리히테의 제자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포스트드라마’적인 것과 음악적인 것들 사이에서 ‘연극적 실험’을 이어가고 있는, 연출가 임형진이 지난 8월 11일부터 21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혜화당’에서 “동의에 관한 바덴의 학습극 – 무엇이 당신을 소진시키는가?”라는 공연을 올렸다.
독일의 희곡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쓴 두 편의 희곡, “대서양 비행횡단(1929)”과 “동의에 관한 바덴의 학습극(1929)”을 각색한 이번 공연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기법을 활용한 공연으로, 연출자 임형진이 바라보고 있는 2016년 대한민국의 모습을, ‘대중 소비사회’, ‘폭력적인 국가의 조직 – 무능한 국가와 그 희생자들’, ‘지식인과 지방대 시간강사들의 문제’, ‘과학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소외’라는 주제로 세분화해서, 한국의 실정에 맞게 각색했고, 그 내용을 포스트드라마 연극으로 연출했다.
연극 혹은 드라마로 알려진 일반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과 사건과의 관계다. 그래서 어떤 인물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이런 관심이 드라마적인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며, 전달과 소통, 미적 행위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연극의 ‘언어적 텍스트’와 ‘무대화된 텍스트’의 구조와 기능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연극의 새로운 내용이며, 형식적 실험이다. 그래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종래의 연극이 ‘재현’에 집중했던 것과는 반대로, ‘현존’과 ‘경험’을 중요한 표현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콜라주, 몽타주의 기법과 함께 다층적인 언어의 구조와 다양한 언어로 이루어진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텍스트는 단일한 민족의 언어로 표현하기를 거부한다. 1991년 독일의 하이너 괴벨스가 발표한 “로마의 개”가 바로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영어, 독일어, 불어로 공연했다.
임형진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세 가지 층위의 개념을 구조화해서 퍼포먼스 텍스트를 만들었다. 아무도 할 수 없었던 대서양 횡단비행을 성공한 린드버그의 용기와 비행 중에 희생당한 혹은 추락한 정비사의 실존에 관한 문제가 첫 번째 개념의 축이며, 많은 사람들의 ‘동의’와 ‘열망’에 의해 형성된 현대사회의 발전이 결국은 ‘자유 시장주의 경제’로 발전하고, 기술편중적인 인력시장을 형성하게 되면서, 대량실업과 빈부의 극심한 격차를 만들어 냈으며, 그 역사적 발전단계와 정치적 실천의 과정에서 우리가 지나쳤거나 동조했던, 혹은 무관심했던 국가의 폭력, 침략, 식민주의의 역사가 결국 현재의 우리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현실인식이 두 번째 관점이며, 이러한 개념과 관점이 분명함에도 지금 우리가 점차 ‘소진되어 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에 대한 질문이 마지막 층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경험의 현존을 공유하기 위한 의도가 공연에서 보이고 있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연극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과 제약을 뛰어넘어,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과 다른 매체와의 융합을 시도하면서, 연극적 표현의 영역을 엄청나게 확장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연극을 보면서 즐길 수 있었던 연극 감상의 재미와 감동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는 부족하거나 전혀 없으며, 다소 어려운 얘기와 복잡한 전달방식으로 인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연극이 단순히 즐기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진지한 그 무엇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매우 흥미로운 형식이며 내용이 될 것이다.
연극에서 언어적 전달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언어적 전달의 오류와 편협성 또한 경계해야할 위험이다.
몸의 감각을 회복하고 사유하는 연극을 지향하는 극단 ‘테아터라움(철학하는 몸: 연극 공간이라는 독일어 표현)’의 이번 공연은 1927년 5월 20일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비행기 조종사 찰스 린드버그가 뉴욕과 파리 사이를 무착륙 비행 횡단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인간이 인간을 돕지 않거나 혹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에 관해 질문하는 연극이며, 결코 대답하기 쉽지 않은, 그러나 누군가는 이 시대에 꼭 해야만 하는 물음이다.
(이 글은 세상을 움직이는 문화예술전문지 월간 <THE MOVE> 2016년 9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한국의 소녀와 영국의 소년 : 청소년의 소외와 고립

 

2014년부터 한국과 영국은 청소년 연극을 만들기 위한 공동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국에서는 국립어린이청소년극 연구소(소장 유홍영)가 참여했고, 영국에서는 연출자인 피터 윈 윌슨과 작가로는 캐나다 출신의 영국작가 에반 플레이시가 함께했다. 그리고 지난 9월 1일부터 11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된 “오렌지 북극곰”의 한국측 작가로는 고순덕, 연출로는 여신동이 공연제작에 동참했다. 2017년에는 한국 배우들과 영국 배우들이 함께 만드는, 두 언어가 공존하는 작품으로 발전할 계획이라고 한다.
“오렌지 북극곰”은 이민자 가정의 소년(안승균 역)이 영국이라는 사회에서 경험하게 되는 소외된 삶과 할머니와 함께 사는 이혼한 아빠의 딸 지영(김민주 역)의 고립된 삶을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특이한 구조의 공연이다. 그래서 영국 소년의 이야기는 영국의 또 다른 소외된 소녀 (최희진 역)와 안창환, 강정임, 장원혁의 도움으로 진행되고, 한국의 지영이 이야기는 다시 지영의 할머니 (강정임 역), 아빠 (안창환 역), 우연히 승강기에 함께 탄 남자 (장원혁 역)와 함께 별도로 이어진다. 결국 영국 소년과 한국의 소녀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서로 부닥치거나 만나지 않는다.
영국 소년의 이야기가 일반적인 청소년의 소외, 특히 이민자의 가정이라는 영국적 특수 상황과 연관해서 진행되는 반면, 한국 소녀인 지영이는 이제 막 초경을 시작하고, 소녀에서 여자로 성장해가는 성장기 소녀의 문제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즉 서구적 시각에서의 청소년문제가 외부적 환경의 문제로 시작했다면, 한국의 지영이는, 내부적 가치관의 혼돈 혹은 성장기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문제를 포함했다는 것이다.
여신동은 연출뿐만 아니라, 무대미술에도 관여했는데, 무대를 네모난 얼음덩어리로 구성해서, 극장을 좌와 우로 갈라, 양쪽 벽면에 출입구와 벽면을 세우고, 관객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공연을 지켜보도록 구성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왼편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영국에서 일어난 일을 중심으로 구성했고, 오른쪽 벽면을 중심으로는 한국의 이야기를 표현했다.
첫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이 얼음상자로 쌓인 양측 벽을, 뚫고 나오듯이 등장하면서, 얼음 상자들이 부서지는 장면은, 매우 흥미로웠으며, 청소년들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관념을 허물어버려야 한다는 암시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소년과 한국소녀의 이야기가 만나거나 이어지지 않은 채, 평행선을 이루며, 전혀 다른 축과 구성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두 이야기의 연계성이나 상호 보완적 혹은 융합의 과정이 마련되지 않아, 다소 지루하고, 문제의식의 나열에 그치는 공연으로만 받아들이게 되어서 매우 아쉬웠다. 결국 한국과 영국이 공동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유와 프로젝트 구성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고, 단지 두 개의 서로 이질적이고, 고립된 이야기와 상황을, 같은 무대 위에서 어렵게 조합해냈다는 결과만으로는, 공연의 성과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엄마와 아빠의 이혼으로, 할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한국 소녀 지영이. 엄마가 남겨 놓고 간 화장대 밑에 웅크리고 있던 어린 시절. 해녀인 할머니가 물질을 포기하고, 서울의 아파트로 옮겨와 갑갑하게 갇혀 있어야만 하는 상황. 사춘기가 지나고, 소녀에서 여자로 성장하는 지영이는 괜히 할머니에게 투정을 부리고, 아빠와 할머니 모두를 부정하며, 스스로 고립된 삶을 찾아가는, 성장기 십대의 중학생이다. 지영이와 거의 비슷한 또래의 한국 소년들이 겪는 또 다른 이야기가 “오렌지 북극곰”에 등장했다면, 두 이야기가 아무리 병렬적으로 진행되었어도, 나름 설득력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영국의 소년’, 그것도 ‘이민자 가정의 소년’이어야 했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2017년 영국의 배우들과 한국의 배우들이 두 개의 언어로 이 공연을 진행했을 때, 과연 어떤 의미와 성과를 공연을 통해 찾아 볼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결국 두 개의 이질적인 문화를 하나의 무대 위에서 융합과 복합의 화학작용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제안과 해결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섞어버리면, 문제가 더 복잡해지거나,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 하게 된다.
(이 글은 세상을 움직이는 문화예술전문지 월간 <THE MOVE> 2016년 10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민주적 의결과정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진실 찾기

 

지난 10월 13일부터 30일까지 대학로 미마지 아트센터 ‘물빛 극장’에서 공연된 극단 ‘산수유’의 일곱 번째 정기공연 작품은 레지날드 로즈가 쓰고, 시드니 루멧 감독이 연출해서, 1957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다. 김용준이 다시 번역하고, 류주연이 연출한 이번 공연은 1964년 런던에서 무대공연으로 초연된 이후 지금까지 꾸준하게 연극으로 공연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일본어로 된 영화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공연했던 기록을 제외하면, 이번 공연이 초연이다. 김용준의 번역과 동아 연극상 신인 연출상을 수상한 극단 ‘산수유’의 대표 류주연이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그리고 60년 전,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한국의 현실에 맞게, ‘오늘, 지금 여기’의 시각과 관점으로 재구성해서 연출한 작품이다.
한상훈, 홍성춘, 강진휘, 남동진, 이종윤, 유성진, 신용진, 반인환, 홍현택, 이렇게 9명의 남자 배우와 원작과는 달리 세 명의 여배우, 현은영, 김애진, 박시유를 ‘화가 난 남자들’에 포함시켜서 연출했다.
미국의 배심원제도는 형사사건의 경우, 배심원 모두의 만장일치로 유죄여부를 판단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를 죽인 소년의 재판에서 모두가 유죄라고 생각하는데, 유일하게 배심원 한상훈만이 무죄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전원이 만장일치로 의결하기 위한 심층적인 토론이 진행되고, 이 가운데에서, 배심원들은 점차로 유죄에서 무죄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한다. 영화 시나리오 자체가 한 공간에서, 집중적인 토론과 논쟁으로 진행되는 일종의 ‘법정 드라마’와 같은 형식이라서, 매우 지루하고, 답답한 구조일 수 있으나, 류주연 연출은 가장 중요한 배심원장을 어린이집 교사인 젊은 김애진에게 맡김으로서,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비민주적’이고,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극심한 ‘사회적 편견’에 대한 반성과 통찰의 기회를 만들어냈다.
자기 아들이 자신에게 저항하고, 덤벼든다고 해서, 무조건 유죄를 주장하는 남동진은 끝까지 혼자서 유죄를 주장하다가, 결국 자신이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고, 결국 배심원 모두가 소년의 무죄를 확신하게 된다는 이 공연은, 민주적 의결과정이 얼마나 많은 함정에 싸여 있으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진실을 외면하고, 혹은 무시하고, 오직 자신만의 판단과 결정으로 주변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야구시합을 보러가기 위해, 배심원의 합의가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진휘의 집단이기주의와 스스로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해, 지금은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차지한 홍성춘의 무례하고도 폭력적인 언동과 태도는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독불 장군’으로서의 불통을 드러내며, 홍성춘과 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한 유성진은 가장 먼저 소년의 무죄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상훈처럼 용기 있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즉, 소년의 아버지는 가슴이 칼에 찔려서 숨졌는데, 그 칼은 손잡이가 위에서 아래를 향해 찔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보다 작은 키높이의 소년이 어떻게 위에서 아래를 향해 칼을 찔렀을까 에 대한 의문에 대해, 신용진, 남동진, 홍성춘은 아버지가 무릎을 숙였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견을 펼치지만, 유성진은 소년이 사용했다고 추측하는 그 칼은, 자신의 경험으로서는 위에서 내려찌르는 용도의 칼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해서, 절대적으로 소년의 유죄를 믿었던 배심원들의 판단을 바꾸게 만든다. 또한 노인이라고해서 참여자들로부터 무시당하던 이종윤이 안경을 쓰고 있는 신용진의 콧잔등에 생긴 흔적으로, 증언을 했던 목격자인 노처녀도 안경을 쓴 사람이고, 잠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나, 안경을 쓰지 않은 채로, 소년이 아버지를 칼로 찌르는 장면을 봤다고 하는 진술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증인들의 위증으로, 죄 없는 소년을 죽게 만들 뻔했던 재판을 용기 있는 시민이 바로 잡았는데, 왜 이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 모두가 화를 내고, 성난 사람들이 되었을까? 처음에는 이들 모두가 진실을 외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점차 진실이 드러나면서 이들은 화를 내고, 새롭게 밝혀지는 진실에 대해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현은영은 배심원 모두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공연의 주제인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하기 위한 ‘진실 찾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글은 세상을 움직이는 문화예술전문지 월간 <THE MOVE> 2016년 11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집단과 개인의 대립 : 대한민국과 ‘파란 나라’

 

지난 11월 16일부터 27일까지 남산 예술센터에서, ‘2016 시즌프로그램’으로 김수정 작/연출의 “파란나라”가 공연되었다. 19명의 출연진과 39명의 마지막장면 출연자를 포함한, 58명의 젊은이와 영상을 통해 ‘파란 혁명’에 동참한, 전 연령대의 사람들을 포함하면, 백 명이 넘는 인원이 이번 공연에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2015년에 이어 2016년에도 “파란 나라”를 연출한 김수정은, 1967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큐버리 고등학교의 역사수업시간에서 시행한 실험, ‘제 3의 물결’을, 한국의 EBS 지식채널에서 ‘환상적인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했는데, 이 프로그램의 내용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개인의 변화와 교실혁명을 통해, 새로운 ‘파란 혁명’을 꿈꾸는 과정으로 재구성해서 이번 공연을 만들었다. 평등한 관계라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교실이라는 생존의 터를 새롭게 일구어보겠다는 이들의 열망은 결국 10%에 불과했던 독일의 ‘나치’ 지지자들이 나머지 90%의 독일인과 함께 대규모의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던 ‘홀로코스트’의 가해자가 되었던 과거의 역사를 반복한다. “파란 나라”에 등장하는 세계사 기간제 교사 이종민은 학생들의 집단적 광기가 점차로 확대되어가는 과정을 독일의 ‘나치’ 지지자들의 광기와 비유하면서 경고했으나, 이미 일정한 힘을 형성한 학생들은 그들의 지도자였던 이종민 대장을 집단에서 제거한다.
처음 교실에서 각자의 생존방식에 몰두했던, 대한민국의 철없는, 개념 없는, 문제아 학생들이 혁명의 주인공이 되고,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충실했던, 모범생들은 점차 이들 새로운 권력집단의 하수인 내지는 희생자가 된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대한 감상을 주제로 수업을 진행하던 학생들이 새로운 수업의 진행방식으로 도입한 이종민 선생의 ‘게임’에 휘말려, 집단의 힘이 어떻게 개인을 소외시키고, 집단의 폭력성을 강화하며, 새로운 독재자와 집단의 전체주의적 힘을 키워가게 되는지, 체험을 통해 배우게 되는 이 연극은, 집단의 힘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개인을 무자비하게 파멸시켜 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교사와 학생의 ‘평등한 관계’에 대한 교육적 대안은 이미 브라질의 교육 철학자이자 실천가인 프레이리에 의해, 1970년대 초에 소개되었으나, 한국에서는 좌파의 교육론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저서 ‘페다고지(교육학)’를 ‘민중교육론’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으나, 군부독재자들은 그 책을 금서로 규정해 읽지 못하게 했다. “파란 나라”에서 다루고 있는 학생과 교사의 관계는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회피하고,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무관계의 관계에서, 조직의 보스와 하급자의 관계로 발전한다. 중간과 과정은 없이, 학생들은 우연한 사건으로, 교사에게 급속히 다가가고, 교사는 학생들을 손아귀에 넣는다. 집단의 힘이 커지면, 비대해진 집단이 어떤 광기로 개인을 위협하게 되는지를 표현한 “파란 나라”는, 대안이 없는 한국의 교육, 입시 위주의 교육제도에 대한 신선한 반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 연극에서 보여주는 해법이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위험하고, 무분별하며, 비교육적인 집단논리, 혹은 정치인들이 즐겨 찾는 ‘패거리’의식에 불과하다는 비난과 비평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래서 연극이 아닐까? 연극의 힘은 때로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큰 힘과 용기를 우리에게 북돋아 준다. “파란 나라”는 의기소침하고, 미래에 절망한, 현실에 불만이 가득한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의식, 새로운 집단최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파란 나라”에서 보여준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던 곳이 바로 1933년 독일이었고, 그곳에서 히틀러의 추종세력인 ‘나치’가 태어난 것이다. 대한민국이 21세기의 새로운 ‘파시즘’의 본향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경고와 함께, 우리 젊은이들에 대한 기성인들의 생각과 행동이 급격하게 변해야 할 시점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연극이 바로 “파란 나라”다. 이 연극에 숨겨진, 이 연극이 포함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점들은 바로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고, 이 연극에서 보여주는 ‘집단의 논리’는 최소한 현실문제에 대한 한 가지 해법으로 적용해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연극이 보여주는 결말과 같은 과정으로, 대한민국이 발전하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집단과 개인의 관계가 ‘대립’과 ‘충돌’이 아니라 ‘화합’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해법과 대안을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세상을 움직이는 문화예술전문지 월간 <THE MOVE> 2016년 12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마술적 사실주의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1936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1956년 반체제 운동을 하던 남편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에 정착해, 1970년대부터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다가, 2011년에 죽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3부작 소설, ‘비밀노트’, ‘타인의 증거’, ‘50년간의 고독’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 1993년과 2014년에 한국에 소개 되었다. 한국의 대표적 희곡작가이신 윤조병선생님이 이 소설을 각색하셔서, 그 아드님이신 윤시중 연출로 극단 ‘하땅세’ 단원들과 함께 지난 2016년 12월 6일부터 29일까지 두산 아트센터 ‘Space 111’에서 “위대한 놀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올렸다.

1949년 유고슬라비아 출생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자로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가 바로 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책 속에 들어있다고 얘기할 정도로, 이 작품에 매료되어 있었다. 같은 동유럽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와 비교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학성과 예술성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사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밀란 쿤데라만큼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다. 그러나 그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삶의 비통함을 검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게 그려내는 작가’로 알려졌으며, 헤겔, 마르크스,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정치이론, 영화이론 그리고 이론정신 분석학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의 관점에서 본다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마술적 사실주의를 결합한 대중문화의 이상적 세계로 보였을 것이다.

2013년에는 이 소설의 1부에 해당하는 ‘비밀노트’가 ‘The Notebook’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86년에 쓴 1부 ‘비밀노트’는 오빠를 클라우스로 자신을 루카스로 등장시킨 소설이다. 2부 ‘타인의 증거’는 1988년에 완성되고, 몽상과 거짓말 사이를 오가는 우화인 ‘50년간의 고독’은 1991년에 출간 되었다.
극단 ‘하땅세’의 공연 “위대한 놀이”는 이 3부작 소설의 1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나, 내용면에서는 2부와 3부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쌍둥이로 등장하는 문숙경과 이수현이 계속 붙어 다니면서 진행되는 이번 공연은 악사로 등장하는 서상권이 멋지게 아코디언을 켜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든다. 엄마로부터 떨어져 할머니(남미정 역)에게 맡겨진다는 1부의 설정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만, 무대는 테이프에 의해 구분되고, 화살표에 의해 분할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아버지의 대 사전’을 들고 할머니 집을 찾아 온 이 쌍둥이가 할머니로부터 ‘사는 법’을 배우면서, 그들이 관찰한 세상을 아버지의 언어가 담긴 사전의 언어로 배운다. 쌍둥이와 할머니, 악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배역은 1인 다역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독일군’과 ‘소련군’, 마을 사람, 닭이나 염소 등 동물을 몸과 소리로 표현한다. 언청이, 하녀, 엄마의 역을 맡은 조선주는 이번 공연에서 쌍둥이 역을 맡은 문숙경, 이수현 못지않게 열심히 바쁘게 움직이는데, 이웃집 개와 섹스를 하는 언청이 역과 먹을 것을 사기 위해 할머니 집에 찾아오는 사제관의 하녀역, 전쟁이 끝나고, 쌍둥이의 새로운 동생과 함께 이들을 찾아 온 쌍둥이 엄마 역과 기타 군인, 마을사람의 역을 도맡았다. 늘씬한 몸매와 치렁치렁하게 기른 머릿결을 휘날리며, 군인의 제복으로, 창녀와 같은 모습으로, 때로는 순박한 시골처녀의 모습으로 다양한 변신을 통해 이번 공연의 분위기를 ‘마술적 사실주의’로 띄우는데 큰 공헌을 한 조선주의 연기는 그 이전의 공연,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에서 보여주었던 차분함과 ‘카르멘’이나 ‘동백부인’과 같은 열정과 매력을 지닌 여배우형 연기와는 전혀 다른 강렬하면서도, 도발적인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안정된 연기력으로 사람들이 ‘마녀’라고 부르는 할머니역의 남미정은 이번 공연의 ‘포스트모던’한 스타일 연기를 잘 보여주었고, 쌍둥이 역의 문숙경과 이수현은 이번 공연의 핵심적인 세계, ‘놀이와 거짓말’, ‘현실과 환상’, ‘주어진 삶과 만들어 진 삶’의 이중적 구조를 정확하게 표현해 냈다. 이번 ‘하땅세’의 공연에서 특이하게 보였던 것은 무대를 상징적으로 구분하여 기능적으로 사용하면서도, 몇 가지 기본적인 장치와 조명의 효과만으로도 유태인 수용소와 같은 환상적이고도 가상적인 세계를 잘 표현해 냈다는 사실이다. 가장 사실적인 연기를 하면서도, 상징적인 무대를 적절하게 활용한, 뛰어난 공간연출의 힘은 아마도 연출자가 원래 무대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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