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해피엔딩/ 최승연

‘참된 만남은 오직 우리가 슬픔 속에 있을 때 이루어진다’
–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최승연(청강문화산업대, 뮤지컬학과 조교수)

 

작/가사: 박천휴
작곡: 윌 애런슨(Will Aronson)
연출: 김동연
단체: 대명문화공장 네오프러덕션(제작)
공연일시: 2016/12/20-03/05
공연장소: DCF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
관극일시: 2017/02/04 7pm.

 

 

 

대학로 뮤지컬들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 신통치 않았던 대형 창작뮤지컬들이 지나가고 대학로 중소극장 창작뮤지컬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우란문화재단과 HJ컬쳐, 김수로프로젝트, 그리고 창작산실의 결과물들은 참신한 아이디어와 세련된 음악을 선보이며 동시대 뮤지컬 관객들을 차근차근 흡수하고 있다. 시장의 불안정성이 여전한 가운데 대학로의 선전은 매우 좋은 신호임에 틀림없다. 뮤지컬 드라마의 외연 확장이 공통적인 특징으로 발견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 와중에 <어쩌면 해피엔딩>은 대학로 뮤지컬의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작품에 관련된 몇 가지 양상을 살펴보자. 첫째, 박천휴-윌 애런슨은 <어쩌면 해피엔딩>의 성공을 발판으로 뮤지컬 작가-작곡가 콤비로 안착했다. 이미 윌 애런슨은 <마이 스케어리 걸>(2009) 작곡에서 시작하여 작사가로 참여했던 박천휴와 함께 <번지점프를 하다>(2012)를 성공시킨 바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에서는 박천휴의 역할이 훨씬 확대되면서 이들의 콤비 플레이 역시 더욱 강화되었다. 둘째, 이 작품은 2015년 가을부터 우란문화재단 프로그램을 통해 개발되었다. 우란문화재단은 2014년 설립 이후 뮤지컬 <공동경비구역 JSA>, <곤 투모로우>, <무한동력>, <도리안 그레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을 제작 지원하거나 자체 프로그램을 통해 개발하면서 성공적인 창작뮤지컬 브랜드를 형성하고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이미 시작부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탄생한 셈이다. 셋째, 작품의 OST 역시 흥행 성공에 힘입어 인기 몰이 중이다. 뮤지컬 관극과 상관없이 극장에 OST만 구매하러 오는 관객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이는 뮤지컬 관극 이후 음악을 통해 작품의 여운을 길고 내밀하게 향유하려는 관객들이 많다는 증거다.

 

만남과 관계를 정공법으로 다루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위의 양상들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이는 작품의 최대 강점인 ‘아이디어를 길어 올리는 방식’에 있다고 판단된다. 주인공은 로봇이지만, 작품은 로봇을 최첨단의 SF적 감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충만한 무대와 오브제, 그리고 클래식한 연극적 움직임을 통해 표현한다. 로봇을 소재로 한 작품들에 흔히 예상되는 방식이 아닌 것이다. 작품은 인공지능의 발전을 두려워하는 인간문명을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포착하는 대신, 거꾸로 인간에게 버림받고 노쇠해가는 로봇을 다룬다. 외로움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기계의/기계적인 삶을 살고 있던 그들이 ‘만나게’ 되고 삶의 구획을 ‘벗어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과정이 자세히 그려진다. 이쯤 되면 작품은 로봇과 문명을 소재로 취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인간’의 이야기, 더 나아가 ‘만남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관객이 반응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혼밥, 혼술이 타인과 함께 즐기는 삶의 방식보다 더 익숙한 지금/여기에서 만남과 관계를 정공법으로 다루는 뮤지컬이라니. 그것도 동시대의 이슈를 활용해서 말이다. 작품은 확실히 현실의 리얼리티보다 삶의 어떤 계기를 중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관객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작품이 ‘만남의 의미’에 대한 의표를 찌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김상봉이 말했듯, 우리는 슬픔 속에 있을 때 타인과 진정으로 만날 수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말라버린 근원적 슬픔을 인식하는 존재들을 조명함으로써 참된 만남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그 자체로 조명될 가치가 있다.

 

슬픔을 일깨우는 만남

 

작품의 주인공은 남자로봇 올리버와 여자로봇 클레어다. 이들은 2049년 한국에 사는 헬퍼봇들로서, 철저히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제작되었고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인간에게 봉사’한다는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채, 나날이 노쇠해가는 몸을 끌어안고 주인에게 버려진 헬퍼봇들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작품은 이러한 전사를 이면에 깔고 올리버의 일상을 묘사함으로써 시작한다. 올리버의 일상은 경쾌하고 유쾌하며, 심지어 행복해 보인다. 듀크 엘링턴의 앨범을 모으고 관련된 읽을거리들을 소비하며 화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인 올리버에게 ‘슬픔의 그림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올리버는 빈병을 모으며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주인 제임스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지만, 올리버는 이를 슬퍼하지 않는다. 클레어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로봇 클레어는 ‘남자주인들’에게 버려진 경험을 많이 갖고 있지만, 그 경험으로부터 관계의 무용성과 존재 자체의 외로움을 학습한 후 무감각한 일상을 살고 있을 뿐이다. 작품 초반부 이들의 일상은 과도하게 명랑하고 경쾌하게 그려지는데, 이는 존재의 비극성을 아이러니하게 강조하는 연출 방식으로 해석된다.

감각과 감정이 배제되었던 일상은 이들이 만나고 사랑하게 됨으로써 완전히 무너진다. 충전기가 고장 나 도움을 청했던 클레어를 올리버가 결국 받아들이고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면서 내면이 깨어날 계기를 맞이한 탓이다. 올리버는 주인 제임스를 만나기 위해, 클레어는 제주도에 서식하는 반딧불이를 만나기 위해 이들은 함께 길을 떠난다. 헬퍼봇 아파트를 벗어난다는 금기를 함께 깨고 나옴으로써 작품은 로드 무비의 양식-성장의 드라마를 차용한다.

그렇다면 올리버와 클레어에게 성장이란 무엇일까. 그들의 인공지능 수위를 한 단계 더 높이는 것, 다시 말해 존재의 근원적 비극성을 스스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이러한 해법이 가능했던 것은 이미 올리버와 클레어는 더 이상 부품도 생산되지 않는 단종된 고물 로봇, 게다가 버려진 로봇이라는 한계 상황에 놓인 존재라는 점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 순간, 황홀하면서도 슬픈 감정에 휩싸인다. 함께 하는 일상이 생각보다 근사했지만 곧바로 얼마 남지 않은 일상을 상대방과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없는 ‘슬픈 상황’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심화된 관계를 통해 이들의 감각과 감정이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진화하자 곧바로 인식되는 존재의 비극성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테마이다. 만남과 함께 인지되는 슬픔의 상태, 그로 인해 진정성 있게 포착되는 만남과 헤어짐의 양상들은 이 작품을 진중하게 이끌고 간다.

 

희극과 비극의 다이나믹스

 

그러나 작품은 비극을 마냥 비극적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비극을 희극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메인 무대는 올리버의 방 안이다. 이 안에서 두 주인공의 여정과 제임스의 집, 이들이 함께 묵는 모텔, 그리고 반딧불이의 숲 등이 간단한 소도구와 무대 상의 위치 변화로 표현된다. 따라서 작품에서 길게 다루어지는 ‘여행의 과정’은 올리버와 클레어의 대사와 노래, 그리고 연기패턴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작가 박천휴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 여정을 인간과 로봇 사이의 경계를 위트 있게 질문하며 채워 나간다. 가령, 이런 식이다. 올리버와 클레어는 여행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최대한 인간과 같아 보이도록 끊임없이 어떤 전제를 만든다. 둘은 진경과 선영이라는 한국이름을 가진 연인이며 비 오는 날 뉴욕의 거리에서 처음 만났다. 그 때 올리버는 빨간 레인코트에 빨간 모자를 쓴 클레어가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을 받아 주었다. 또, 이런 식이다. 둘은 절대로 사랑을 해서는 안 된다. 작품은 이러한 전제들을 깨고, 희화화하며 웃음의 코드를 만든다.

연출 김동연은 두 로봇에 억양이 없고 빠른 특징적인 말투와 간단한 기계적인 움직임을 부여하여 희극적 수치와 비극적 리얼리티를 동시에 높였다. 가장 돋보이는 지점은 헬퍼봇 파이브(5)인 올리버에게 프로그래밍된 ‘천만에요’라는 겸양의 표현이 기계적으로 튀어나오는 장면들이다. 헬퍼봇 파이브들은 ‘고마워’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천만에요’를 하도록 고안되어 있는데, 연출은 이를 템포감을 이용하여 희극과 비극의 양면으로 활용한다. 헬퍼봇 식스(6)인 클레어가 올리버에게 ‘고마워’라는 단어를 줄기차게 말하며 골려먹는 장면에서 빠르게 이어지던 템포감은, 이들이 기억을 초기화하기 직전의 장면에도 이어진다. 더 이상 슬프지 않기 위해, 그저 로봇으로 살기 위해 사랑했던 기억을 반드시 지워야 했던 이들이 여전히 ‘고마워-천만에요’를 기계적으로 외치는 장면은 이전 장면의 희극적 감각을 일깨우는 동시에 매우 비극적이다. 인간의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로봇의 비극적 아이러니가 희극과 비극의 다이나믹스를 통해 강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결말로 향할수록 작품의 리듬이 처지고 사랑의 전형성이 상기되는 지점들은 이 작품의 약점으로 거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은 연기의 합이 돋보이는 배우들의 열연(정욱진, 전미도)으로 실제 공연 현장에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멀티 플레이어(고훈정)의 적절한 연기의 열도, 섬세한 드라마의 결을 세련된 멜로디 라인과 화성으로 표현하는 넘버의 조합 역시 작품의 흥행에 한 몫을 하고 있다. 강렬한 감성을 덤덤하고 담백한 멜로디로 담아내거나 음악 안에서 드라마의 진행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윌 애런슨의 작곡 스타일은 중소극장 뮤지컬에 잘 맞아떨어진다.

향후 박천휴-윌 애런슨 콤비의 작업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사랑을 테마로 한 중소극장 규모의 작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기대해도 좋을까? 기억을 완전히 초기화하지 않아 다시 돌아간 일상 속에서 클레어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올리버의 이야기처럼, 어쩌면, (그래도) 괜찮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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