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아/ 윤진현

화려한 도의의 세계: <메디아>

윤진현(연극평론가)

작 : 에우리피데스

번역 : 우르반 알렉산드라 에스테르

각색 : 로버트 알폴디

연출 : 로버트 알폴디

단체 : 국립극단

공연일시 : 2017/02/24~04/02

월수목금 19:30, 토일 공휴일 15:00

공연장소 : 명동예술극장

관극일시 2017/03/29 15:00

인간의 사유와 이념을 ‘신(神)’으로 표현하는 이 도저한 그리스 신화와 비극의 세계는 언제나 거역할 수 없는 매혹이다. 더구나 얼핏 생각하기에는 자기 자식을 살해하는 사악하고 극단적인 ‘메디아’는 금지된 문 너머에서 마성적인 빛을 내뿜어 문틈으로 쏟아져 나오는 빛만으로도 공포를 이겨내고 결국은 그 문을 열게 만드는 인물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복종을 거부하고 에덴을 뛰쳐나가 마녀의 시조가 된 릴리트와 사랑의 여신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여신이기도 한 메소포타미아의 이슈타르가 섞여있는 느낌이랄까. 코르키스, 동방의 이민족 출신인 메디아의 성격상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사랑과 배신에 따른 복수의 구조로 메디아를 이해하는 것은 전통적이다. 에우리피데스는 당시 이방인 메디아를 최악의 악녀로 그려냄으로써 이 작품의 핵심을 그리스와 비그리스의 대립, 문명과 야만의 대결로 설정한 것이었고 자식을 죽이는 극단적인 죄악을 저지르는 메디아는 곧 야만의 상징으로 그리스가 승리하고 정복하며 문명화해야 할 대상으로 형상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위대한 작가의 상상력은 늘 작가 개인이 표면적으로 형상화한 주제 이상을 남겨주기 마련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아>에 기본적으로 전제된 신화는 자식을 잡아먹거나 죽이는 필리사이드(Filicide, 자식살해)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사실 배우자의 부정에서 현실적이지만 불합리한 것이 남편보다 그 상대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메디아가 배신한 남편보다 크레온의 딸 글라우케를 살해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이것은 흔한 일이다. 메디아가 문제적인 것은 배신 당사자인 남편과 그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혈육이기도 한 자식에 대한 행동이다. 이는 대단히 부자연하고 기이하다.

극단적이지만 예를 들어보자. 동물 재생산과정의 특징은 여성은 명백하나 한정된 후예를 가질 수 있는 데 비해 남성은 불확실하지만 무한정한 후예를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메디아가 자식을 죽이고 글라우케를 죽인다고 해도 이아손의 후계가 확실히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메디아가 자신의 자식을 죽이는 것은 엄정하게 말해 이아손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후계를 끊는 자멸에 다름 아니다. 이아손을 죽이는 것보다 그 새 아내와 자식을 죽이는 것이 이아손에게 더 고통스럽다는 주장은 유지되는 것 자체로 기쁨을 전제하는 삶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삶이 유지되기만 한다면 언젠가 고통은 무디어지고 삶은 다시 빛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관객이 <메디아>에서 갖게 되는 질문, 가장 불가해한 행위는 자식을 죽이는 행위 바로 그것이다. 도대체 어미가 왜 자식을 죽이는가, 언제 어미가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는가, 바로 이 점을 질문해야 하는 것이다.

생존이 불투명한 환경에서 생물은 각기 다른 결단을 한다. 대부분 식물은 생장을 멈추고 번식에 집중한다. 소나무에 솔방울이 과도하게 많이 달려있다면 그 소나무는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중이다. 하여 생장하는 대신 솔방울을 만들어 씨앗을 남기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포유류는 극단적인 환경일 때 자식을 포기한다. 양육환경이 최저생존조건에도 미치지 못하면 어미들은 출산을 멈추고 심지어 제 자식을 물어죽이기까지 한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면 자식을 죽이는 어미를 가장 사악한 마녀처럼 말들 하지만 살 수 없는 환경에 자식을 팽개치는 어미보다 더 사악하지는 않다. 제대로 키울 수 없기에 출산이란 본능적 기쁨을 억누르며 2세를 포기하는 결정이 흔한 나라, 연일 최저 출산율을 경신하고 있는 나라의 우리는 태어나야 할 아이들을 낳지 않는 것으로 죽게 한다는 의미에서 메디아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메디아의 선택에 개연성을 부여하기는 쉽지 않다. 자식을 죽이는 어미를 어떻게 옹호할 것인가. 때문에 국립극단의 <메디아>에서는 그러한 도전을 기대했었다.

사진제공: 국립극단

그러나 이 점에서는 확실히 실망했다고 해야겠다. 로버트 알폴디의 해석은 전통적인 악녀 메디아에서 그다지 진전되지 않았다. 이아손이 메디아를 살해하는 결말에 집중하면 오히려 메디아를 살해함으로써 악녀에 대한 징계를 완결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자식을 죽인 메디아의 결단에 질문하는 대신 자식을 죽인 그녀의 행동을 처벌하는 결론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프로그램에 소개된 인터뷰에 의하면 알폴디는 자식을 죽인 자는 그 후에 실제로 살아갈 수 없으며 때문에 메디아의 죽음이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멸과 피살은 역시 다르지 않은가. 자식을 죽인 자가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추상적인 이념일 뿐이다.

아울러 알폴디는 이아손이 메디아를 죽이는 행위로 둘의 사랑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이어가는 방법으로서의 ‘사랑’은 한계가 없다. 반대말이 없다고도 하겠다. 사랑은 살인도 살신성인도 가능하다. 사랑의 반대말로 집착이나 증오, 무관심, 방치 등 무한히 들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이 모든 것을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게 하는 한 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메디아에게서 헌신적인 사랑의 여신이면서 동시에 잔혹한 전쟁의 여신이기도 한 이슈타르가 느껴지는 점과 연관하면 타당한 접근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친 사랑이 중심이 되고 알폴디의 해석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메디아를 살해한 이아손의 사랑과 회한이 더 적극적으로 드러났어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의 결말은 명백히 이아손의 분노였고 메디아를 죽인 이아손은 메디아를 무대에 버려둔 채, 죽은 아이들만을 양손에 안고 퇴장한다. 메디아의 분노와 파괴적인 행동에 직면하여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이들과 동행하는 파국을 맞았다면 차라리 그러한 해석에 동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까지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이들의 사랑이 진정으로 운명적이고 거대한 것이었다면 메디아나 이아손이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지만 극단적인 결정에 이르는 과정에 더 집중되어야 했을 것이다. 복수를 계획하는 메디아는 오로지 자기계획을 위해서 이아손을 유혹할 뿐이며 메디아에게 여전히 욕망을 느끼는 이아손은 이를 깨닫고도 아무 행동의 변화가 없다. 무엇으로 이들이 죽이고 죽는 것이 사랑의 결과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알폴디의 해석은 다만 평범하고 도의적인 데 머물고 있을 뿐이다.

사진제공: 국립극단

이러한 평범한 결론을 넘어서는 극적 충격은 무대에서 나왔다. 이혜영의 연기는 늘 경탄스러운 것이지만 기존의 그 어떤 작품도 ‘메디아’라는 문제적 성격을 형상화하면서 이혜영이 보여준 열정을 능가하기는 어렵다. 단순한 무대는 인상적이었고 코러스를 배치하고 이용하는 방식은 매우 출중한 것이었다. 이들의 현실적 발언과 논쟁적 태도 또한 단순한 해석을 완화하는 좋은 기획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아들 배역의 어린이들을 무대 전면에 세운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원작에서도 그렇지만 아이들의 죽음은 무대에서 형상화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아이들을 잃고 그 고통이 진행 중인 사회를 향해서 보여주는 바로는 무신경하고 잔인하였다. 국립극단의 다양성이 세계적인 교류를 통해 보완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여 일각의 배타적 태도가 부당하고 편협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이를 넘어서는 성과란 연출자의 다른 국적을 넘어서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는 당연히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현대의 인간을 위한 진정한 인간애의 기반 위에 서있다고 할 것이다.    

* 이 글은 홍창수 작 인천시립극단의 <메데아네이처>론(<<한국희곡>>,2015,봄호)에서도 개진된 바 있는 <메디아>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공유하고 있음.

**사진제공: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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