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끝줄 소년/ 장윤정

의미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대면하기를 대면하다

: <맨 끝줄 소년>

장윤정(연극평론가)

원작: 후안 마요르가

번역: 김재선

연출: 김동현

리메이크 연출: 손원정

기획 · 제작: 예술의 전당

공연일시: 2017. 4. 4~2017. 4.30

공연장소: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관극일시: 2017. 4. 14, 금요일, pm3:00

 

 

 

예술은 상실과의 대면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판타지로 구성된 삶에서 아주 잠시 잠깐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간동안 결코 견딜 수 없는 주체와의 대면을 가능하게 만드는 곳이 바로 극장인 것이다. 극장은 결코 삶을 재연하는 것에 그치는 곳이 아니다. 거기엔 판타지로 점철된 삶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굳이 시간과 자본을 들여 극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적어도 필자는 그러하다. 물론 그 걸음이 헛된 경우가 수도 없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다. 헛된 그 속에서도 일말의 일상의 틈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으므로. 그런 와중에 진실로 예술의 방향성을 담지하는 작품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맨 끝줄 소년>이 그러하다. <맨 끝줄 소년>은 한마디로 해석하거나 정의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사유를 요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맨 끝줄 소년>이 예술에 가까운 것은 마냥 복잡한 구성 때문만이 아니다. 상호 연관될 것 같지 않은 지점들이 긴밀하게 관계를 형성하여 의미를 확장하고 있으면서 서사의 구성이 이성에 따른 의식의 흐름을 벗어나 새로운 사고로 읽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미 2015년 예술의 전당 기획으로 초연을 올리고 호평을 받은 바 있는 <맨 끝줄 소년>은 여전히 그 명성에 걸맞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맨 끝줄 소년>의 서사는 문학교사 헤르만과 제자 클라우디오가 이끌어간다. 헤르만은 젊은 시절 자신이 못다 이룬 작가의 꿈을 클라우디오를 통해 대신 해소하려 한다. 클라우디오에게서 나타나는 글쓰기의 재능을 더욱 발전시키길 원하면서 지도하지만 그것은 클라우디오를 위하는 방식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방식이다. 클라우디오는 글쓰기에 열망을 가지고 있으나 사실 그보다 더 강한 무언가를 욕망한다. 클라우디오의 글쓰기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이루어진다. 그 중심에는 관음증적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맨 끝줄에 앉는 소년인 클라우디오는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는 자리에서 모두를 지켜보는 시선으로 타인의 삶을 조용히 그림자처럼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면밀하고 은밀하게 관찰하는 인물이다. 결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쓸 수 없는,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쓰고 싶은 클라우디오는 점차 자신의 서사 속에 스스로 개입한다. 그리고 전지적인 작가의 능력으로 글쓰기를 좌지우지하듯 실제 타인의 심리 또한 좌우하려하며 결국 삶을 스스로 제어하고자 한다. 클라우디오가 주목하는 것은 중산층의 라파 가족이다. 그 속에서도 라파의 어머니 에스테르에 집중한다. 그것은 그녀가 그 완벽할 것 같은 중산층 가족의 틈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스테르는 여지없는 중산층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채울 수 없는 외로움과 소외감을 지닌 인물이다. 클라우디오는 누구보다 틈을 매우 잘 발견하며 그 완벽한 것의 균열을 기다렸다는 듯이 급작스레 파고드는 인물이다. 그 욕망의 배경에는 어머니의 결핍이 존재한다. 그것은 완벽한 가족에 대한 열망으로 나아갈 수 있으나 사실 클라우디오의 깊은 욕망은 완벽한 ‘가족’의 일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클라우디오의 욕망은 존재의 확인 차원에 더 가깝다.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에게 “필연적이면서 예상하지 못한, 그럴 수밖에 없으면서 반전이 있는 결말”을 가르친다. 그리고 클라우디오는 성실히 그 가르침에 따라 에스테르와의 관계가 정리된 후 헤르만의 아내 후아나에게 접근한다. 이 사실을 안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에게 따귀를 날리고 둘의 관계는, 그리고 클라우디오의 서사는, 마지막으로 <맨 끝줄 소년>의 서사는 끝이 난다.

<맨 끝줄 소년>은 여러 가지 면에서 관객의 흥미를 자극한다. 그것은 클라우디오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이 일치되어 인물들을 내밀하게 지켜보는, 관음증에 따른 인간의 원초적 자극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 클라우디오는 얼마든지 금기의 선을 넘나드는 인물로 나타난다. 클라우디오에게 사회적 약속 같은 것은 부차적이다. 클라우디오는 존재 자체와의 대면을 욕망한다. 그 존재는 상실과 결핍을 경험하고서야 진짜 클라우디오를 만나게 된다. 클라우디오라는 기표를 한 거기엔 이미 상실과 결핍으로 점철된 그 자체가 그림자처럼 자리하고 있다. 클라우디오는 상대가 스스로 온전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결핍을 스스로 대면하게 되었을 때 떠난다. 그렇기에 헤르만이 클라우디오를 지도하는 것 같지만 사실 클라우디오가 헤르만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헤르만이 클라우디오의 따귀를 때렸을 때 클라우디오가 “이제 됐어요, 스승님. 끝이에요.”라고 하며 모든 서사에 막이 내리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타 모든 인물들이 모럴의 세계에 속한다면 클라우디오는 모럴의 수준에서 이해되는 인물이 아니다. 다른 인물들은 도덕적 차원에서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클라우디오에게는 죄의식이라고 할 것이 없다. 클라우디오에게서 의미를 발견하고 정의하려는 것은 부적절한 행위다. 클라우디오는 의미론적 차원이 아닌 존재론적 차원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오에게 윤리는 존재와의 동일시에 있다. 클라우디오는 맨 끝줄에 앉아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는 곳에서 모두를 볼 수 있는 완벽한 대타자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또한 온전하지 못한 결핍된 존재다. 그 결핍된 존재는 자신의 결핍을 대면하는 동시에 여타 결핍된 존재들과의 동일시를 행한다. 헤르만은 마치 클라우디오를 받아들인 것처럼 극 중 내내 행동하지만 그것은 진실로 행위가 아닌 행동일 뿐이다. 언제나 클라우디오와의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계를 유지하다가 클라우디오가 자신의 일상으로 개입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질식할 것 같은 가까움으로 클라우디오의 따귀를 때린다. 여기서 클라우디오와 여타 인물들과의 차별점이 생기는 것이다. 클라우디오가 온전한 가족에 속해 있으나 결코 온전하지 못한 에스테르에게 시를 써주는 동시에 키스하는 행위는 존재와의 동일시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유일한 소통의 대상이었던 헤르만과의 절교상황에서도 이제야 자신의 할 일을 끝냈다는 태도 또한 그와 같은 맥락에 있다.

클라우디오의 행위는 의미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으나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얼룩처럼 존재한다. 그것은 클라우디오가 자신의 작품 제목을 “<허수>”로 정하는 것에서도 상징화된다. 허수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수이지만 사실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수다. 그것은 클라우디오의 존재를 상징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을 상징화한다. 클라우디오는 유령처럼 혹은 허수처럼 어디서든 불쑥불쑥 나타난다. 그가 나타나 서사에 개입할 때면 온전한 삶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다. 마치 판타지로 점철된 우리 삶에 주체의 개입으로 인해 판타지에 균열이 일어나는 형상이다. 우리는 상실과 결핍으로 가득한 주체와의 대면을 견디지 못해 그 상실과 결핍을 가려줄 기표들의 판타지로 삶을 이어간다. 그 삶속에서 없는 것 같지만 없는 것이 아닌 주체가 마치 유령처럼 떠도는 것이다. 철학은 주로 판타지가 아닌 대타자, 혹은 의미를 찾기 위한 작업이라는 관점에서 클라우디오가 철학을 어려워하는 것이 일면 이해된다. 클라우디오는 의미의 차원에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러한 서사를 기가 막힌 구성으로 완성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의미의 차원에 벗어난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그야말로 꿈의 서사만큼 적절한 것이 없으리라 믿는다. 작품은 그 어떤 경계도 없이 모든 것을 허물어뜨린 채로 진행된다. 특히 시공간의 경계를 초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전혀 이해의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꿈 속에서 모든 불가능하고 논리로 이해될 수 없는 서사를 매 순간 이해하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꿈의 서사에서는 불가능한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 어떤 시공간의 경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파편화되고 분절된 매 순간을 이해한다. <맨 끝줄 소년>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 어떤 경계를 만들지 않고서도 서사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거기에는 이보다 더 적절한 방식이 없을 것 같은 연출력이 한몫하고 있다. 무대에는 몇몇의 책상 밖에 없다. 그 몇몇의 책상은 순식간에 공간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그 몇몇의 책상은 어디에나 있을법한 몇몇의 책상들이며 아주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유사한 책상들은 역설적으로 서로 다른 유사한 공간으로 인식하도록 해준다. 그와 동시에 녹색 스탠드를 키고 끔으로 인해 공간의 변화를 유연하게 표현함으로써 꿈과 같이 경계 없는 모호한 공간으로 표현이 가능하게 했다. 반투명한 무대의 벽면들은 존재가 존재함을 희미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희미한 벽면 너머로 생생하게 울려퍼지는 구음은 서사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는 동시에 균열된 틈을 타고 잠입하는 소리와 같은 역할을 했다. 모든 것이 이 서사의 구성과 상징에 적합했다. 무엇보다 이 서사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지점은 배우들의 연기라고 볼 수 있겠다. 초연에 이어 클라우디오 역을 다시 맡은 전박찬 배우는 여전히 소년 그 자체였다. 특별히 눈에 띄게 감정의 동요를 표현하지 않는 클라우디오를 연기하기란 분명 쉽지 않았을 터였다. 클라우디오는 마치 공동체 속에 있지만 거기에 속하지 않는 인물처럼 나타나야 했다. 분명 거기 있으나 있다고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 특별히 음성의 높낮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불안하고 거센 소용돌이가 느껴져야 하는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인간적이면서도 인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존재가 클라우디오여야 했다. 그 지점을 전박찬 배우는 더없이 잘해내주었다. 헤르만 역의 박윤희 배우는 더 말해서 무엇 하랴. 그는 언제나 기대조차 하지 않게 만드는 배우다. 굳이 기대를 할 필요가 없기에. 그만큼 필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관객들에게 이미 신뢰를 굳건히 쌓은 배우라고 하겠다. 그 외에 에스테르 역의 김현영 배우는 어린 소년에게도 이성적 매력을 불러일으킬 만큼 중년의 여성미를 차분히 드러내었다. 에스테르는 사실 큰 감정의 변화를 겪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폭발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다시 내면화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그 잔잔하지만 파동이 큰 감정의 변화를 김현영 배우는 차분하게 드러내주었다. 후아나 역의 우미화 배우는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동시에 도덕적 의식이 강한 인물을 맡아 세련된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언제나 완벽하고 강할 것 같던 후아나가 클라우디오와의 대면에서 헤르만에게 하지 못했던 자신의 진실 된 내면을 은연중에 표현하게 되는 지점은 이 작품에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인데 우미화 배우의 세련되고 완벽주의의 이미지가 역설적으로 그 잠시 잠깐의 틈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버지 라파 역의 백익남 배우는 이 작품의 감초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백익남 배우는 어설픈 웃음을 자아내는 아버지로서의 모습과 가부장적인 남편으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잘 표현해내었다. 그와 함께 아들 라파 역의 유승락 배우는 클라우디오와의 대면이 잦은 역할을 했기에 연기의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아들 라파는 수학보다 철학에 관심이 많은 중산층의 평범하고 사랑받는 아이다. 그 아이가 자신의 온전하고 완벽한 것에 균열이 생기려는 순간을 포착하고 맹수의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아들 라파는 누구보다 온전한 의미체계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클라우디오와의 대립은 어쩔 수 없다. 어리숙할 것 같지만 그 내면은 자신만의 철학으로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인물이기에 연기에 있어서도 철저한 분석이 필요했을 것이다. 유승락 배우는 걱정 없는 소년의 밝은 모습을 연기하는 동시에 그 완고한 내면세계의 구축에 대하여 고민했으리라 짐작된다.

<맨 끝줄 소년>은 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작품이자 고(故) 김동현 연출의 작품인 동시에 손원정 연출의 작품이다. 2017년 다시 무대에 오른 <맨 끝줄 소년>은 여전히 2015년 고(故) 김동현 연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분명 고(故) 김동현 연출만큼 후안 마요르가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여 무대 위에 표현해낼 이는 이제 더 없지 않을까 감히 짐작하는 바다. 후안 마요르가의 작품은 읽어내는 것도 쉽지 않으나 그것을 무대 위에 표현해내는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작품읽기는 상상으로 이해 가능하나 무대는 물리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그런데 이 상상으로 이해 가능한 부분을 고(故) 김동현 연출은 누구보다 완벽하게 해내었다. 모호하고 난해한 작품의 구성을 관객의 상상 속에서 얼마든지 이해 가능하도록 만드는 연출이었다. 2017년 다시 만난 <맨 끝줄 소년>은 그래서 반갑고 또 헛헛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오와 헤르만이 상실과의 대면에서 다시 출발하듯이 우리에게도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이 온 것이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떠나버린 인물로 역사 속에 박제화하지 않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그의 작품세계를 다른 이들을 통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의미의 차원을 벗어난 존재의 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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