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평론] 청춘, 18대 1/ 최승연

***이 글은『연극평론』 2017년 봄호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아직은 더 달려야 한다

– 뮤지컬 <청춘, 18대 1> –

 

 

최승연(청강문화산업대학교 뮤지컬스쿨 조교수, 뮤지컬평론가)

작/가사: 한아름

작곡/편곡: 황호준

연출: 서재형

단체: 극단 죽도록 달린다

공연일시: 2017/01/17-02/05

공연장소: 아트원씨어터 1관

관극일시: 2017/01/21 4pm

2017년 초에 공연된 2016 창작산실 우수신작 뮤지컬 중 <청춘, 18대 1>은 여러모로 눈에 띄는 작품이다. 작품의 원작은 주지하다시피 2008년 두산아트센터 창작자육성프로그램으로 선정, 공연된 연극이다. 당시 작품은 폭넓은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렇다면 뮤지컬은 과연 원작과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서재형, 한아름이 이끄는 극단 죽도록 달린다의 ‘연극에서 뮤지컬로’ 프로젝트는 이 작품을 계기로 어떠한 탄력을 받게 될까?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 작업에 참여했던 작곡가 황호준은 <청춘, 18대 1>에서는 또 어떠한 비기를 보여줄 것인가? 연극이 뮤지컬로 전환되어야 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뮤지컬을 통해 발견될 수 있을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러한 질문들은 실제 관극 후, 아래의 몇 가지 생각으로 정리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극단 죽도록 달린다는 아직 더 달려야 했다.

무모한 청춘들을 노래하다

드라마는 바뀐 것이 없었다. 동경의 조선인 청춘들은 여전히 무모했고 용감했다. 춤이 완성된 단계에 도달할수록 죽음으로 향하는 역설 역시 긴장감을 끝까지 잘 유지하고 있었다. 이 사이에 씨줄과 날줄로 엮인 작품의 핵심 모티프도 때때로 소환되는 과거 속에서 노래와 대사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살아있다면 우리처럼 부딪혀봐’라는 핵심 대사는 중요한 국면에서 효과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박열 열사와 그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가 독립운동가 김건우와 그의 일본인 아내 나츠카로 부활하고, <가와가야의 파도>라는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그림이 나츠카가 김건우의 독립운동을 이해하고 이어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맥락화되는 방식 또한 다르지 않았다. 작가 한아름이 이미 여러 차례 명확히 밝혔던 것처럼, 나무배를 타고 휘몰아치는 파도와 위태롭게 싸우는 사람들과 후지산이 대비되는 그림은 김건우와 나츠카의 관계를 설정하는 중심 이미지로 여전히 건재했다.

이 핵심 모티프에서 파생된 ‘무모한 청춘’이라는 컨셉은 말보다 오히려 노래로 울려퍼질 때 훨씬 강렬하고 애절했다. 이러한 점에서, 넘버 ‘살아있다면 우리처럼’은 주목될 필요가 있다. 작품이 나츠카와 김건우의 내밀한 관계를 설명하고, 이후 모두 ‘춤을 추는’ 거사에 참여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하는 넘버이다. 드라마의 진행을 추동하는 일종의 방향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넘버는 과거 속의 김건우가 그림 <가와가야의 파도> 내용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의 소명의식을 피력하는 내용을 담는다. 음악적으로는 ‘한계상황’을 설정하는 가사에 크게 도약하는 멜로디를 결합하여 드라마틱한 정서를 만드는, 지극히 뮤지컬스러운 어법이 활용되어 있다. 작품이 전체적으로 간단한 민요와 엔카에서부터 룸바, 차차, 왈츠 스타일의 춤곡을 다양하게 배치해 놓고 있지만, 이 넘버의 스타일과 극적인 기능은 <청춘, 18대 1>이 뮤지컬을 지향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후렴구 반복을 통한 주제 강조, 멜로디 진행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흡입력은 작품 전체를 통과하는 일관성을 충분히 만들고 있었다.

연극의 틀과 뮤지컬의 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충분히 효과적인 넘버를 보유하고 있는 <청춘, 18대 1>이 뮤지컬로서 불완전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확히 말해, 연극의 틀을 완전히 못 벗은 상태에서 뮤지컬을 지향하는 그 균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먼저 ‘취조극’이라는 작품의 형식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작가 한아름은 연극으로 초연될 당시 객관적 시선을 확보하기 위해 취조극의 형식을 차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청춘들의 죽음이 몽환적으로 느껴질 여지가 있다는 서재형 연출의 조언에 따라,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고려되었던 요소였다. 취조극의 특성 상 작품은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이 과거로, 취조되고 있는 현장이 현재로 이분화되고 ‘살아남은 자’ 윤하민이 과거 사건을 진술하면서 겪는 심리적 변화를 따라갔다. 더불어 ‘일본인’ 취조관의 심리 역시 세밀하게 그려졌는데, 작품 말미에서 ‘조선인’ 청춘들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길 정도로 심리의 변화폭이 컸다. 이러한 형식적 특징은 청춘들의 선택을 객관화시키고 동시에 그들의 죽음을 윤하민의 생존과 대비시킴으로써 더욱 비극적으로 몰아갔다. 다만, 일본인 취조관의 변화된 심리 상태는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뮤지컬이 이 취조극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대사로 진행되는 드라마의 힘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취조의 현장은 음악으로 전환되기에는 너무 설명적이며 분절적이다. 그래서일까? 뮤지컬 <청춘 18대 1>은 사건을 객관화시켜야 한다는 명제에 사로잡혀 연극의 틀을 깨고 나오지 못했다.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는 취조의 현장은 뮤지컬의 전체적 인상을 결정짓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 만약 사건에 객관성을 부여하고 싶었다면 윤하민을 서술적 화자로 활용하는 방법을 고려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에비타>의 체 게바라나 <노트르담 드 파리>의 그랭구아르처럼 극 중 인물을 겸하면서 사건을 진술하고 이에 반응하는 서술자를 활용하는 방법 말이다. 혹은 아예 취조극 형식을 벗어나는 방법도 있다. 반드시 뮤지컬도 청춘들의 죽음을 객관화 할 필요가 있었을까? 연극에서도 사실 그들의 죽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객관적으로만 ‘전달’되지는 않았던 터, 아예 뮤지컬은 그들의 죽음을 정면승부 하듯 다뤘다면 어땠을까? 작품의 관점을 바꾸고 ‘살아있다면 우리처럼’과 같은 넘버를 유효적절하게 배치하여 작품을 훨씬 극적으로 세련되게 몰고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뮤지컬의 장르적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뮤지컬 대본에서 음악이 들어갈 자리를 찾는 작업을 스팟팅(spoting)이라고 한다. 뮤지컬의 음악은 보통 ‘인물이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서가 고양되었을 때’ 들어가는 것 것이라 이해된다. 영화 이론가들이 뮤지컬 영화를 ‘고도로 인위적이며 형식주의적인 양식’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말이 노래로 점핑할 때의 간극을 초점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뮤지컬이다. 이 간극을 즐기는 사람과 즐기지 못하는 사람에 따라 뮤지컬 장르에 대한 호불호가 나뉠 뿐이다. 그런데 노래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이해 외에도 스팟팅의 요건은 하나 더 있다. 그리고 사실 이 요건이 충족되었을 때 진정한 뮤지컬의 형식이 완성된다. 넘버 없이 드라마가 진행될 수 없다는 원칙. 만약 넘버가 삭제된 상태에서 드라마가 진행된다면 그것은 스팟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청춘, 18대 1>은 이 요건에 비추어보아도 어중간한 작품이었다. 앞서 설명한 ‘살아있다면 우리처럼’을 포함하여 작품의 후반부에 배치되어 있는 ‘비가 내린다’, ‘마지막 인사’와 같은 넘버들은 뮤지컬 넘버로서의 기능에 충실한 모델들이다. ‘춤을 추는’ 거사에 뜻을 같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심리적 균열들을 ‘비가 내린다’는 은유적 가사로 해소하고, 두려움을 버리고 다함께 고향에 가자는 ‘마지막 인사’는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드라마의 핵심적 지점들을 음악으로 잘 풀어낸 넘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음악적 완결성을 갖추지 못한 채 드라마와도 긴밀히 얽혀 들어가지 못하는 넘버들이 빈번히 눈에 띈다는 점은 문제적이다. 가령, ‘살아있다면 우리처럼’ 이후 나츠카의 ‘후회할 일은 하지 않아’는 두 개의 넘버로 분리되기보다 하나의 넘버로 붙어 드라마의 핵심 변곡점을 힘차게 밀고 나가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나츠카의 중대한 결심이 단독 넘버로 강조되었지만 절규하듯 짧게 끝나는 독창은 그 극적 무게감을 반감시켰기 때문이다. 오히려 김건우와 나츠카 사이의 관계를 하나의 넘버 안에서 다루어 완결시키고 이를 통해 나츠카의 결심을 단단하게 치고 나가는 방식이 더 유효했을 것이다. 또한 작품에서 드라마의 작은 변곡점들을 만드는 정기철의 경우 넘버가 아닌 대사로 그 심리의 깊이를 드러내고 있어, 정작 순자와 함께 부르는 듀엣에서는 이미 대사와 행동을 통해 충분히 관객에게 인지된 감정이 사족처럼 표현된다는 점 또한 작품의 애매함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스팟팅의 실패는, 후반부로 갈수록 음악이 조밀하게 붙어 있어 작품을 청각적 과잉 상태로 몰아간다는 점에서도 또한 발견된다. 넘버의 전체 개수는 여느 뮤지컬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전반부의 넘버가 잘 기억나지 않고 대사로 드라마가 전달되었다는 점은 작품의 장르적 균형감을 훼손시켰다. 이렇듯 뮤지컬 <청춘, 18대 1>은 아직 원작 연극에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은, 실험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를 뮤지컬의 어떤 전형성을 거부하기 위한 수법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중소극장 창작뮤지컬 사이에서 존재감을 가지려면

현재 대학로의 뮤지컬 시장은 중소극장 창작뮤지컬들이 지속적으로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분위기 상승세에 놓여 있다. 대학로 뮤지컬과 대형 뮤지컬 사이의 구별짓기가 엄존하는 현실 속에서, ‘부상하는 것(the emergent)’으로서의 중소극장 창작뮤지컬의 약진은 위태롭던 내수 시장에 매우 희망적인 신호임에 분명하다. 2016년 말부터, 우란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작, 이후 <나나흰>), <어쩌면 해피엔딩>, HJ컬쳐의 <라흐마니노프>, 김수로프로젝트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은 탄탄한 작품성과 스팟팅이 균형감 있게 성취된 매력적인 넘버들을 선보이며 선전하고 있다. 특히 뮤지컬로 흡수될 수 있는 드라마의 스펙트럼을 넓히며 관객의 호응을 얻어내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백석의 시집과 전기적 사실을 뮤지컬로 전환한 <나나흰>, 고철 덩어리가 되어가는 로봇들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과 ‘함께 하는 것’의 가치를 일깨우는 <어쩌면 해피엔딩>, 유명 러시아 음악가 라흐마니노프의 ‘접혀진 생애’를 본격적으로 다루어 뮤지컬에서도 정신분석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예시를 제시한 <라흐마니노프>,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을 인간과 돌연변이들의 사랑으로 풀어낸 <로미오와 줄리엣>은 제각기 독특함을 내세우며 기존 중소극장 뮤지컬들의 전형성을 탈피하고 있다. 더불어 각 작품에 사용된 음악 역시 신선함과 세련미가 돋보인다. 한 마디로, 2017년 중소극장 대학로 창작뮤지컬들은 각종 지원제도에 힘입은 젊은 창작진들의 젊은 감각을 제대로 흡수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러한 상황에서 뮤지컬 <청춘, 18대 1>에게 남겨진 과제는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2008년에 흥행했던 원작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 뮤지컬에 더 적합한 어법을 창출하는 것, 그 이후 궁극적으로는 극단 죽도록 달린다가 목표하고 있는 ‘청소년 뮤지컬’ <청춘, 18대 1>을 완결짓는 것이다. 스러진 청춘들이 이 복잡하고 냉혹한 시대에 반드시 재조명되어야 하는 지독한 역설이 단순한 역설이 아니라 당위로 인식될 수 있도록 보완되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가창력이 좋은 뮤지컬 배우가 작품에 기용될 수 있기를!

최승연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뮤지컬스쿨 조교수. 주로 뮤지컬 관련 논문을 쓰며 뮤지컬 이론을 정리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뮤지컬이 대중과 만나는 다양한 양상들에 대해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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