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 메밀 꽃 필 무렵/ 백승무

<<한국연극>> 6월호 재수록

메밀꽃 필 무렵 연극도 필 것이다

백승무

원작: 이효석

각색: 정범철

연출: 윤정환

극단: 강원도립극단(선욱현 예술감독)

상연장소: 세종M씨어터

관극일시: 2017.04.26. 16:00

선욱현이 왔다. 4년만이다. 그을린 구릿빛 팔뚝에 다부진 근육이 붙었다. 박토를 옥토로 바꾸는 역사를 이룬 덕이다. 강원도는 지폐 한 장 주고 평창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만드는 공연을 주문했다. 남은 돈으로 극단 육성에도 힘쓰고 순회공연도 열심히 하란다. 정식 단원 2명인 강원도립극단에 떨어진 하명이었다. 4년 야전생활 끝에 강원도 사람이 되어 왔다. 민중적 정서와 신명의 감성을 품고 근육을 불끈대며 ‘금의환향’했다

봄이 되면 모스크바 극장가는 황금마스크축제로 들썩거린다. 러시아 전역에서 내로라하는 극장들이 대표 레퍼토리 공연을 들고 두 달간(2월~4월) 경연을 벌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하면 에든버러, 아비뇽과 함께 세계 3대 연극축제로 꼽히는 체호프축제를 떠올리지만, 정작 규모나 참여도 면에서 보자면 ‘황금마스크’가 단연 최대축제이다. 연극축제가 국내 최고 행사라는 사실도 대단하거니와 국제규모 축제보다 국내 축제가 더 흥겹고 떠들썩하다니 이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전국 각지의 특색과 개성을 지닌 작품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각축을 벌이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해 페름, 트베리, 야로슬라블, 보로네시, 하바롭스크, 옴스크 등 명성이 자자한 지역뿐만 아니라, 샤리포보, 글라조프, 미누신스크 등 듣다보다 못한 지역의 무수한 극단들이 수년간 벼려온 작품을 관객들에게 진상한다. 러시아의 연극 인프라가 총동원되어 특유의 지방색을 뽐내며 기발하고 재간 넘치는 작품으로 예술 경연을 펼치는 것이다. 축제 참가는 예술적 기량과 자질을 평가받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고, 후보작이 되는 것만으로도 극단의 영광이자 지역민의 자긍심이 된다.

무릇 축제는 그래야 한다. 1년 넘는 준비기간과 수개월에 걸친 관객과의 소통, 정교한 연출, 숙련된 연기, 물오른 앙상블 등 삼박자를 갖춘 각지의 공연들이 한데 모여 자웅을 겨룰 때 축제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이다. 그렇게 중앙과 지방은 강점을 흡수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삼투압 효과를 누린다. 연극 발전이 제도로서 보장된 것. 선욱현 예술감독이 이끄는 강원도립극단의 「메밀꽃 필 무렵」 공연은 여러모로 황금마스크 축제를 떠올린다. 극단 창단한 후 매년 레퍼토리를 하나씩 개발해온 선욱현 감독이 4년 만에 비장의 무기를 들고 서울에 왔다. 강원도 각지를 돌며 관객들을 웃고 울리며 장돌뱅이 생활을 해오던 그가 드디어 서울에 왔다. 선욱현 감독이 한 일은 어쩌면 한국연극의 미래가 담긴 청사진의 일부가 아닐까?

레퍼토리로 승부하라

<메밀꽃 필 무렵>은 성공한 공연이다. 현지인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도 그렇거니와 서울을 비롯한 순회공연의 반응 역시 끓는점에 도달했다. 뚜렷한 흥행작 없이 침체의 늪에 빠진 대학로 연극을 떠올리면 <메밀꽃 필 무렵>의 파이팅은 유난히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겨우 155만 명의 인구를 가진 강원도의 한 극단이 만든 공연이다. 2호선 하루 이용객만 해도 211만이고, 성남시와 고양시 인구만 합쳐도 200만이다. 인프라도, 재정도 열악한 지방 극단이 고정 레퍼토리를 개발하며 연중 공연활동을 한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도립극단을 창단하고 매년 한 개씩 레퍼토리를 개발해온 선욱현 감독의 집념은 지방 극단의 성공사례에 그치지 않고 한국연극의 미래를 앞당기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꾸준한 레퍼토리 개발과 상시 공연에 대한 집착은 극단을 살리는 숨통이자 명줄이다. 일찍이 “레퍼토리는 연극의 심장이다”라고 갈파한 메이에르홀트의 경구처럼 강원도립극단이 선택한 레퍼토리제 운영방식과 지속적 공연활동은 매너리즘과 무기력증에 빠진 대학로 연극이 반드시 습득해야할 덕목이다. 동계올림픽 홍보라는 명분이 있긴 하지만 모든 지방극단들이 이렇게 전국을 순회하며, 연극문화와 연극 인프라를 독점하고 있는 서울공화국의 장벽을 부수는 파성추가 될 때 진정한 연극발전이 보장된다.

소통과 교감으로 일군 민중적 정서

작품의 성공에 가장 크게 기여한 요인은<메밀꽃 필 무렵>이 무엇보다 민중적 정서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서민의 보편적 정서를 샅샅이 어루만지며 예술이 포괄할 수 있는 다양한 가치를 편안하고 친근하게 전달할 때, 지역민 특유의 생활방식과 생활감각에 맞춰 사물과 배경을 형상화했을 때, 관객의 태도와 반응에 호응하여 적극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때 민중적 정서가 성립한다. 이효석의 원작을 무대화하려는 결정부터 장터 공간의 흥겹고 유쾌한 분위기와 메밀꽃밭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을 극화하려는 의도에 이르기까지 공연은 여일하게 민중적이고 토속적인 정서 위에 서있다. 신명나는 풍물놀이와 상모돌리기, 판소리, 장정끼리 펼치는 액션활극, 그리고 조선달의 사랑을 표현한 현대무용과 관객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라이브뮤직 등 「메밀꽃 필 무렵」은 서정과 서사, 문학성과 연극성, 토속성과 현대성을 오가며 풍성하고도 야무진 볼거리를 장착하고 있다. 관념성과 계몽성을 버리고 지역민의 개성과 정서를 중시하는 과감한 전략은 용기와 재능뿐만 아니라, 뚝심과 배포가 필요하다. 거기에 절박함과 진정성이 묻어날 때 드디어 민중적 정서가 탄생한다. 당장의 성과에 눈이 멀어 조잡하게 일을 벌이는 설핀 얼뜨기가 아니란 말이다.

고급진 통속성

대중 악극 형식을 띤 <메밀꽃 필 무렵>의 통속성은 폄하하고 경시할 무언가가 아니라, 연극 고유의 속성으로서 배우고 익혀야할 천연덕스러움에 가깝다. 통속과 신파는 평범하고 익숙한 감정에 의탁하여 대중을 위무하는 공연 형식인바, 과잉 관념과 늘썽한 의도가 지배적인 대학로 연극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기본기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내용이 제대로 조율된 형식에 담길 때 관객은 반응한다. 통속성이 요구하는 능수능란함과 구체성, 연극적 천연덕스러움은 성긴 관념성과 과도한 진지함에 포위된 한국연극이 재활을 위해 반드시 체득해야할 우선 자질이다.

민중적 정서가 충만한 통속성은 예술성에 다가간다. 이때 감각적 웃음은 호쾌한 정화의 웃음으로 전환되고, 작위적 혼합주의는 유기적 다성성으로 승화한다. 문학성의 호위를 받는<메밀꽃 필 무렵>의 통속성은 이처럼 다부지고 정감 있다. 메밀꽃 흐드러진 들판은 풍류를 부르고, 달빛 젖은 산길은 사유를 부른다. 허생원의 한복과 조선달의 퓨전의상, 그리고 동이의 양복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 시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고, 근대화의 역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한과 향수를 머금고 있다. 장돌뱅이 직업도 그렇고, 장마당 문화도 그렇고, 그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도 그렇다. 모두 사라지고 훼손된 옛 것에 대한 통속적 그리움을 품고 있다. 풀벌레, 달빛, 밤하늘, 별, 들꽃, 메밀꽃, 도토리, 물레 등 강원도의 자연 정경도 그 목록의 일부이다.

이처럼 서울이라면 촌스럽고 구태의연하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공연이 지방색과 민중적 정서를 머금더니 한 편의 풍경화로, 질펀한 신명놀이로 태어났다. 더할 것 덜 것 없는 정범철 ‘작가’의 절묘한 각색과 여러 장르와 기법을 정갈하게 교통정리한 윤정환 연출의 상상력이 일등공신임은 말할 것도 없다.

순식간에 지방 명문극단으로 급성장한 선욱현 사단의 실험이 찻잔 속 폭풍이 될지, 지방연극 활성화의 기폭제가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외지인’ 선욱현 감독이 지방의 연극화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즉 지방의 연극문화를 부활시키고 지역성에 토대한 연극창작을 활성화시키며 현지 연극 자원을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의 성공 여부는 한국연극의 미래에 하나의 표지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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