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티스/ 오유경

한국극작가가 쓴 미국이야기

미국이야기가 아닌 결국 우리의 이야기

꿈꾸는 자들의 씁쓸한 회환, 그 동화

<아틀란티스>

오유경(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작: 이희준

연출: 김운기

단체: MJSTARFISH/극단 작예모

공연일시: 2017/06/20-07/02

공연장소: 대학로TOM 2관

관극일시: 2017/06/29

제씨의 꿈, 행복한 왕자.

벤의 꿈, 복싱 챔피언 그리고 선장.

미처 몰랐던 죄의 땅, 그 위에 꿈을 꾼 아이들.

유전된 죄를 이 아이들이 어떻게 속죄해야 하나.

오직 눈 먼 자만이 방주에 오를 수 있다면.

작가의 글(이희준)

이보다 특이한 선택이 있을까? 이보다 의아한 선택이 있을까? 한국인 극작가가 쓴 뉴욕 주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사는 토박이 미국인들(결코 재미 한국인들이 아니다), 그것도 60년대 혹은 70년대의 미국형제의 이야기. 번역극(우리가 소위 일컬어 말하는 미국 사실주의극)이 아닌 번역극 같은 순수 토박이 한국인이 쓴 미국배경의 미국인의 이야기, 작품 <아틀란티스>는 이희준 작가의 신작(新作), 초연작이다. 이러한 작가의 선택은 의아함을 넘어서 쉽게 ‘무모하다’라는 평가의 대상이 될 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리뷰를 쓰는 본인조차도 그 선택이 신기하고 궁금하고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론 그 관심의 끝자락에 ‘과연?’이라는 꼬리의문을 달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식의 극작스타일을 고안하려 고심한다. 다양한 희곡들을 연구하며 다양한 이야기 구성방식을 발견하는 과정은 작가들이 기존의 극작적 관습을 어떻게 깨고 얼마나 자신만의 고유한 창작영역을 구축하고 확장하려하는지 추적해보는 흥미진진한 과정이다. 그리고 이희준 작가는 ‘60, 70년대 미국 스테이튼 아일랜드’를 작품 <아틀란티스>의 틀거리로 선택했다.

제씨 맥코이와 벤 맥코이는 미국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사는 형제다. 제씨는 공부를 잘해서 프린스턴 대학교로 진학하고 벤은 복싱을 잘한다. 그들에겐 알콜중독자 어머니 죠앤이 있다. 제씨는 순수한 청년으로 동화 속 <행복한 왕자>처럼 되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계 거물 집안 출신의 앤을 만나고 그는 앤의 조력으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까지 진출하는 유력 정치인이 된다. 벤은 복싱 챔피언이 되어 돈을 벌고 그것으로 배를 사서 전 세계를 여행하는 선장이 되는 것이 최종 꿈이다. 그러나 그는 같은 동향의 건달 니키의 권유로 돈을 벌기 위해 도박 복싱에 나서게 된다. 순수한 꿈을 꾸던 평범한 청년이었던 두 형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이 꿈꾸던 처음의 모습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제씨는 후보경선일을 가까이 앞두고 스트레스로 갑자기 말을 못하거나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잦아지고, 결국 잠적하듯 워싱턴을 떠나 고향 스테이튼 아일랜드로 돌아온다. 한편 벤은 점점 눈이 멀어간다.

이희준 작가는 이 두 형제를 통해 ‘꿈의 inflection(굴곡)’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꿈이 자신의 생각과 달리 혹은 자신의 생각보다 다른 방향으로 커져 버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방향으로 굴곡져 흘러버리는 곧 꿈의 상실, 아니 꿈의 변질, 꿈의 왜곡의 인식시점을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작품에 투영된 또 한 가지의 작가의 의도는 유산처럼 자신도 모르게 물려받은 죄의 대가에 관한 인식이다. 이것은 점점 눈이 멀어가는 벤을 통해 드러난다. 이는 형제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대의 가족비극에 기인한 것이다. 여기에는 다소 복잡한 과거가 얽혀있다.

형제의 외조부, 곧 그들의 어머니인 죠앤의 아버지는 딸의 첫사랑의 남자를 반대하는 것도 모자라 몰래 살해한다. 물론 그 배경에는 그의 위스키공장을 강제로 빼앗으려는 죠앤 아버지의 폭력적 야망이 있다. 또한 형제의 아버지인 죠앤의 두 번째 남자도 무시당하고 물류창고의 경비로 근무하다가 결국 강도를 만나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이 이야기들은 줄곧 비밀로 지켜지다가 제씨의 정치적 반대파인 에디의 추적으로 죠앤의 입으로 밝혀지고 만다. 이 진실이 폭로되면서 제씨는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이 단절되고, 죠앤의 아버지에게 살해되었던 남자의 쌍둥이 형제인 니키(극 결말에 반전으로 밝혀진다)는 복수로 벤을 눈멀게 한다. 그는 복싱경기가 있을 때마다 진통제라고 벤을 속여 약물을 복용하게 하고 그로인해 벤을 의도적으로 눈멀게 해온 것이다. 세계를 여행하는 배의 선장이 되고자했던 벤은 그렇게 꿈의 좌절을 맞는다.   

자신도 모르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선대의 죄, 그 원죄의 대가로 꿈의 좌절을 맞는 후손. 작품제목, 작품 속에서 거론되는 아틀란티스는 흔히 여겨지듯 풍요로웠던 그러나 하루아침에 바다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버린 운명적 비극을 맞은 신비한 도시가 아니라, 선대의 죄와 그로 인해 파생된 그 모든 죄의 대가를 품고 가라앉아버린 후손의 꿈의 몰락을 상징한다. 작품에서 벤은 말한다. ‘내가 왜 눈이 멀었냐구? 아틀란티스를 봤거든.’ 벤의 눈이 멀어지는 것은 곧 비극적 운명을 맞은 아틀란티스 그 자체이다.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안고 가라앉아버린 아틀란티스. 벤의 멀어버린 눈은 그 세상의 모든 죄를 담고 그 대가로 가라앉아버린 아틀란티스다. 외할아버지의 그릇된 욕망의 결과를 대신 책임지는 자. 벤의 꿈은 그렇게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이렇듯 이희준 작가는 지극히 미국의 그리고 미국인의 이야기인 듯한 틀거리로 정작 ‘꿈의 inflection’을 겪는 한국의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드러내고자 했다. 다르게 판단해보면 엉뚱할 정도로 무모한 이러한 극작적 선택이 그대로 한국배경의 지극히 한국인의 이야기로 풀었을 때 따라오는 많은 편견(특정 정치적 상황을 연상케 하는)으로부터 작품이 자유로워지게 만드는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상투적인 극작의 관습에서 완전 자유롭게 놓여나는 또 다른 역발상. 무모해 보이는 그런 선택을 상투적으로 따라 올 이러저러한 평가에 개의치 않고 과감히 저질러버리는 그녀의 용기가 짜릿하게 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아틀란티스>는 아쉬움이 남는다. 짙어지기 전에 관객으로부터 떠나가는 수채화처럼 가볍게 그려지는 삽화적인 장면들. 그로인해 관객은 작품 속 인물들과 그들의 꿈의 좌절, 그 회환을 내 것으로 미처 가져오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된다. 마치 간발에 차로 놓치는 기차를 짙은 아쉬움으로 허망하게 바라보는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던져지는 극의 정보들을 줍느라고 정신이 없다가, 이제 다 주워 놓고 보니 극은 끝나고 그들(인물들)은 이미 떠나가 버리고 없었다. 처음 외국에 여행가서 그 고장에 무엇 무엇이 있고,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겨우 알고, 이제 그들과 좀 이런저런 얘기도 나눠보고 서로 사귀다가, 결국 ‘아! 어딜 가나 사람 사는 이야기는 똑같구나!’ 하는 상투적인 공감에 도달하여, 그들의 삶이 곧 나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의미로 간직하는 여행. 그리고 오래도록 그곳과 그들을 떠올리는 추억을 간직하고 싶은 여행자의 욕망. 이와 다르게 공연은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 풀고, 안내원에 의해 시간일정에 쫓겨 가며 무엇을 보는지도 모르게 끌려 다니다 이런 저런 설명을 듣고, 길가는 도중 스쳐지나가는 낯선 현지인들을 신기한 구경하듯 쳐다보다, 아차! 다음날 새로운 일정을 위해 새벽 기차를 타야하니 서둘러 잠자리에 들어 이 곳 여행을 이젠 그만 마쳐야하는 1박2일 패키지여행 같았다. 본인에게 작품 <아틀란티스>는 이런 여러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다른 정보로는 이렇기 때문에 젊은 20대 관객들은 오히려 쉽게 이해하고 공감했다고 하니, 이런 아쉬움은 본인 개인여행취향의 판단일 수도 있겠다 여겨진다. 작품 속 대사가 떠오른다.

          

‘우린 언제나 배를 타고 떠날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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