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재진 (단국대 명예교수)
[코카서스의 백묵원](Der kaukasische Kreidekreis)
원나라(1259- 1368) 때 이행도(李潛夫의 字는 行道 또는 行甫)가 쓴 [회란기]([灰闌記)를 1925년 클라분트(Klabund. 1890-1928)가 [백묵원]으로 각색해서 크게 공연에 성공한바 있다. 브레히트는 처음 [아우그수부르크의 하얀 동그라미 재판. 1940]이란 단편에 이 소재를 담았다.
그루지니엔(조지아) 공국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총독의 머리가 날아간다. 난리통에 총독부인은 옷가지를 챙기느라 정신없이 서둘다가 자기 아들을 잊고 도망친다. 버려진 총독의 아들을 하녀 그루쉐는 차마 모른 척 떠날 수가 없다. 도둑질하듯 아이를 품어안고 시골로 도주한다. 사랑하는 약혼자인 시몬과 이별하면서! (내가 읽은 브레히트의 시 가운데 , 이보다 더 간결하고 더 애절하고 더 서사극적인 노래는 없다.)
그루쉐
시몬 하하봐, 난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염려 말고 싸움터로 가세요, 군인아저씨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 잔혹한 싸움터로
누구나 다 되돌아 올 수는 없는 그 곳으로.
당신이 돌아오시면 저는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푸른 잎으로 덮인 느릅나무 아래서
당신을 기다릴거에요
푸른 잎이 다 떨어진 그 느릅나무 아래서
당신을 기다릴거에요.
마지막 병사가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까지.
상속자인 총독의 어린 아들은 새 집권자의 표적이 된다. 기병들이 이들을 뒤쫓는다. 산속 깊숙이 숨어든 그루쉐는 아이의 안전을 위해 다 죽어가는 농촌 총각과 거짓 결혼을 한다. 쿠데타가 평정되고 다시 옛시절의 평화가 찾아오자 병들어 누워있던 사내는 갑자기 일어나 남편구실을 하려든다. 병든 것이 아니라 전쟁이 무서워 누워있었던 것이다. 총독부인은 상속권 문제로 아들을 찾아 나선다. 그루쉐는 법정에 서서 총독부인과 아이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게 된다. “때로는 공정하고 때로는 엉터리” 재판관 아츠닥이 재판관석에 앉아있다. 진정한 어미라면 힘이 더 솟구쳐 아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며 그에 따라 판결하겠단다. 그루쉐는 결국 아이를 끌어당기지 못하고 손을 놓는다. “저 아이는 내가 키웠어요, 그런데 나보고 저 아이를 찢어 당기라고요? 나는 그렇게 못해요.” 아츠닥은 그루쉐에게 아이를 넘겨준다. 이행도나 솔로몬의 재판에서는 “참 엄마”를 찾는 반면 브레히트는 “진정한 엄마”를 찾는다.
이 작품으로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고 싶었지만 미국정서와는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곳 입맛에 맞추어 고치고 싶지 않았다. 브레히트는 “미래의 연극”으로 이어가는 서사극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성공한 변증법적 서사극이다. 낙원을 찾아가는 동화극이다.
한국초연
1991년 한국연극협회주최로 워크숍이 있었다. “코카서스의 하얀 동그라미 재판“을 중견 연출가가(정진수, 이상우, 유중렬, 채윤일, 채승훈 등) 각자 팀을 구성하여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이틀씩 이어서 공연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번 (김석만 연출)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내가 번역한 브레히트 작품 중 가장 무대에 많이 올랐다. (출판할 때는 결국 [코카서스의 백묵원]으로 바꾸고 말았지만, 공연할 때는 늘 [코카서스의 하얀 동그라미 재판]으로 나는 고집했었다.)
브레히트 탄생 100주년 서울 국제심포지엄
1978년 브레히트 탄생 80주년을 맞이하면서 여기저기서 “브레히트의 유행은 끝났다”, “끝장난 작가“라며 브레히트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1942- )는 브레히트의 작품에는 내용은 좀 있지만 성탄절 동화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므로 작품 그대로 무대에 올릴 수는 없고 새롭게 조명하며 연출할 수밖에 없으며 “브레히트는 죽었다”고 주장했다.
1998년 독일방송은 브레히트탄생 100주년을 크게 다루었다: “지금까지 브레히트의 작품이 3000만 권 이상 판매되었고, 40여 개국에서 번역되었다. 100주년을 맞아 독일에서는 171개 도시에서, 외국의 경우 69곳 이상의 도시에서 공연할 것이다.” 1959년 실러 탄생 200주년을 기념할 때의 열기를 제외한다면 브레히트만큼 커다란 관심과 열기 속에서 축하받은 극작가는 없었다고 공영방송은 크게 보도했다. 우리도 그 열기에 적지 않게 동참하고 나름대로 기여했다.
1998년 한국브레히트 학회도 브레히트탄생 100주년을 성대하게 치렀다(그때 내가 학회장을 맡고 있었다.). 서울국제심포지엄에서 우리는 “진실은 구체적이다”(Die Wahrheit ist konkret/The truth is concrete.)란 구호아래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루었다. “브레히트 수용과 상속자들”(Brecht-Erben GmbH)과 “표절”문제였다. (퓌지 교수는 [브레히트 주식회사](John Fuegi, [Brecht&Co. 1997]에서 브레히트를 여자들의 노동력까지도(!) 착취한 파렴치한으로 묘사하고 있다.)
칼스루에 대학의 크노프 교수{Jan Knopf. 1944- }는 표절문제를 다루었다: 브레히트는 어떤 물건(작품)을 상품화시키는 “공동작업팀의 팀장이었다”. 에커만은 괴테의 고백을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았던가! “작품을 쓸 때 나는 이것저것, 이 사람 저 사람 것을 들쑤셨다. 그러니 내 작품은 공동작업의 산물인 셈이다. 끝내는 모두 괴테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지만!” 셰익스피어도 “찾아낸” 것이지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는 없다.(비극이든 희극이든 셰익스피어가 직접 착안해서 쓴 작품은 없다.) 나는 가끔 상상해 볼 때가 있다, 브레히트가 심청전이나 춘향전 혹은 흥부전에 손을 대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튀빙겐 대학의 뮐러 교수(Klaus-Detlef Müller. 1938- )는 브레히트의 수용문제를 다루었다. 브레히트의 공연을, 수용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브레히트의 상속자들이란다. 공연의 경우 작품의 삭제, 변형 등은 어느 정도 자유롭지만 허락 없이는 안 된다는 규칙을 정해놓았다. 브레히트는 오히려 아시아나 남미에서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는 편이다. 번역은 물론 공연도 그곳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곳에서는 가진 자와 착취당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단순하고 뚜렷하게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브레히트 상속자들의 손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뮐러 교수는 분석했다. (1971년 Weigel이 죽고 나서 상속자들의 지분분배: 영어권은 아들 Stefan에게, 유럽은 딸 Barbara와 Hanne Hiob. 슈테판은 2009년 죽고 한네는 그 다음 해, 바르바라는 2015년. 이제 슈테판과 바르바라의 아이들에게 상속권은 넘어가 있다. 참고로 1997년 들어온 공연 및 저작권료는 대략 1백만 마르크가 되었다.)
21세기의 괴테
동독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몰락하자 브레히트도 자동으로 사장되는 듯 보였다. 통일 후 사회주의자 브레히트의 수용은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브레히트의 작품은 너무 단순하고 뻔해서 더 이상 새로운 맛이 없다며 이제 고물단지로 역사 속으로 묻어버리려는 듯 했으나 관객이나 독자까지 그런 흐름에 떠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회주의가 몰락했지만 브레히트가 살아남는 이유”를 크노프 교수는 “브레히트는 작품에서 사회주의에 목매지 않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크노프 교수는 관객을 끌어들이는 브레히트공연의 매력을 무엇보다 대중성으로 분석했다. 예를 들어 쿠르트 바일(Kurt Weil, 1900-1950)이 곡을 부친 [서푼짜리 오페라]의 노래(Die Moritat von Mackie Messer/Mack the Knife)를 50년대 암스트롱(Louis Armstrong. 1901-1971)이 그리 시끄럽게 트럼펫을 불어대지 않았던가!(에세이5 참조)
관객은 브레히트의 사회주의적 이념이나 서사극이란 극 이론에 끌려 극장을 찾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많은 극단이 브레히트의 작품을 공연하는 이유는 바로 관객들이 찾아 주기 때문이다, 즉 상업성 때문이다. 바로 작품성 때문이다. 크노프 교수는 교양프로그램에서 브레히트를 “21세기의 괴테“라 이름 붙였다. “언어의 예술사 브레히트의 작품은 내용이 아주 단순하지만 때로는 거칠고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너무나 날카롭다. 그것에 맞게 창조된 주인공들의 성격은 고전적 인간성을 내 품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처럼, 셰익스피어, 괴테나 실러의 주인공들처럼!”
동독의 높은 관리들이 사회주의를 위해 브레히트의 연극을 지원했다면 브레히트는 자신의 연극을 완성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따랐다. 브레히트에게 사회주의는 자기 생각을 담을 그릇이었지 타협할 수 없는 최후의 목적은 아니었다. 브레히트는 계급투쟁을 위해서 일생 연극과 씨름한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이 작품의 주제와 활력소로써 필요했기 때문에 그에 몸담았다. 창조적 작업을 필요로 했던 사람은 사회개혁자 브레히트가 아니라 연극인, 시인 브레히트였으며 이 시인에게 중요했던 것은 투쟁이 아니라 바로 연극예술이었다. (학생들에게 나는 사회주의 몰락 이전부터, 이념을 떠나 시인 브레히트, 극작가 브레히트에게 접근해 보자고 제안하며 이를 강조했다.)
팔 떨어진 미의 여신 비너스
예술작품은 하느님도 그렇지만, 팔 없는 비너스 여신처럼(에세이1) 우리를 내려다볼 뿐 일으켜 세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자문해본다. 우리에게 브레히트와 같은 극작가가 필요할까? 브레히트와 같은 시인이 서양과 동양, 과거와 현재라는 문화적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을까? 그런 고급스럽고 시적인 브레히트의 변증법적 서사극이 빠른 인터넷 시대에 매몰된 우리의 현실을 반영할 수 있을까? 허황된 뮤지컬에 넋을 빼앗기고 허덕이는 우리 관객이 그런 지적 풍자적 언어와 기지로 가득 짜인 고전적 작가 브레히트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럴만한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까?
브레히트가 고전주의 작품인가를 우리가 판가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공연이 필요하다. 무대를 통해 이를 논의하고 점검해야 할 것이다. 많은 공연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또 다른 혹은 새로운 고전주의 작가 브레히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 괴테, 베토벤, 모차르트를 우리는 얼마나 읽고 또 들었는가! 대학로에 요즘 뒤렌마트, 입센은 종종 무대에 오르지만 브레히트의 공연을 보기는 힘들다. 왜 그럴까? 몇 가지 이유를 찾아보았다. 무엇보다 브레히트의 작품에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다. 제작비가 문제가 된다. 하지만 제작비가 지원된다 해도 맡길만한 연출이 별로 없다. 그것보다도 누가 바알, 아츠닥, 푼틸라, 갈릴레이, 그루쉐, 억척어멈, 센테, 요한나의 역을 소화한단 말인가? 그럼 관객은? 무엇보다도 번역은?
에세이를 끝내며
우리는 그간 많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바알’(에세이3)은 엄마를 부르며 자연으로 돌아간다. ‘크라글러’(에세이4)는 혁명의 대열에 끼지 않고 망가진 각시를 끌고 넓은 침대를 찾아간다. ‘센테’(에세이8)는 착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우리에게 묻는다. ‘억척어멈’(에세이8)은 전쟁의 참담함을 잊으며 자식들을 하나씩 잃어간다. ‘맛티’(에세이7)는 좋은 세상을 기다리며 농장을 떠난다. ‘갈릴레이’(에세이8)는 슬기와 술책으로 바티칸의 위협을 이겨낸다. ‘요한나’(에세이6)는 눈보라 치는 도살장의 차가운 마당에 쓰러져 죽어가며 결국 문제의 해답을 깨닫게 된다. ‘그루쉐’(에세이9)는 끝내 “아츠닥의 낙원”을 찾아낸다. 이런 주제나 인물은 모두 고전적인가?
고전주의 작가가 되고자 어려서부터 꿈꾸었던 브레히트의 끔은 동독의 사회주의의 건설보다도 오래되었다. 고전주의가 무엇인지는 그 가치와 규범은 변하지 않더라도 해석방법과 표현양식은 시대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8세기에 빙켈만은 고전주의를 “고상하지만 담백하고 조용하지만 거대해야” (edle Einfalt und stille Größe/noble simplicity and quiet grandeur) 된다고 정의내린바 있다(에세이2 참조). 나는 예술사를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21세기 문턱에 서서 빙켈만을 흉내 내서 브레히트의 고전적 연극세계를 이렇게 정의를 내려본다. 극작가 브레히트는 우리에게 담백하지만 다양하게 요란하지만 재치있게 (einfältige Vielfalt und grelle Witze/simple variety and bright jokes) 많은 문제제기를 했다. 그 제안을 어찌 받을지는 우리의 몫이다.
– 아쉬움 속에 이제 에세이를 모두 끝낸다. 브레히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함을 나 스스로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담지 못하고 버려진 자료들에 미련이 남는다.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애써 지켜본 독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에세이가 어서 끝나기를 은근히 기다린 독자들이 있었다면 그분들에게도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이다. –
교수님, 이번회 글도 잘 읽었습니다.
그간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재확산 영향으로 언제 또 찾아뵐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쪼록 다시 인사드릴 때 까지 건강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ㅎㅎ
이지헌 올림.
그 동안 많이 즐거웠습니다
차분히 브레히트를 정리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글도 기대해봅니다
이재진 선생님께
2020년 COVID-19 바이러스감염병의 전 세계적 범유행으로
모든 인류사회국가가 고통 받고 매우 불편한 현 시대에
연재하신 10편의 에세이는
제게 따뜻한 위로를 주었고
결핍된 공부를 보충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이자 맞춤 수업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다른 어떤 비·평론보다도
제 머릿속에
진솔한 ‘브레히트’의 언어와 작품을 사유할 수 있도록
새로운 장을 펼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에 ‘빙겔만’이 무덤에서 부활하여
조금이라도 현 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면
‘고전주의’ 작가로서 ‘브레히트’를 수용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수상록’에서 은유하셨던
말씀을 잠시 떠올리자면
“인연을 끊지 못하는 슬픔은 아픔의 흔적을 남기며 새로운 만남을 약속하지요.”
이렇게,
늙은 ‘베르테르’는 고인 ‘브레히트’에게 조용히 속삭이는 듯합니다.
언제나 한결같으신 가르침에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승진 올림
선생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브레히트의 작품은 객석에서 볼 때나 무대에서 참여할 때나 늘 저를 깨우고 새로운 세계로 데리고 갔던것 같습니다. 오래전에 관람했던 ‘남자는 남자다’에서의 솔로곡이 떠오릅니다.
‘난 더블린에 오두막에서 태어나 위대한 꿈을 안고 자라났지, 온갖 영웅적인 일에 몸을 던져 내 청춘을 불태웠었지. 하지만 이젠 더이상 난 울고 싶지 않아. 잘난 사람들이 장렬한 희생 떠들 때… 난 조용히, 하지만 분명히 말해 주지. 저 갠지즈강을 좀 봐. 바다로 구비쳐 흐르는 저 거센 물결을 누가 저 강물을 거스를 수 있을까 누가 저 강물에 뛰어 들까… 난 아냐. 내가 왜 그런 일들에 목숨을 버려야 하지? 난 그저 여기 앉아 저 멋진 영웅들에게 장렬한 키스를 보내줄거야. 저 갠지즈강을 좀 봐. 바다로 굽이쳐 흐르는 저 거센 강물을 .. 누가 저 강물을 거스를 수 있을까? 누가 감히 저 강물에 뛰어 들까….’
장렬한 멜로디와 가사가 아직도 떠오릅니다.
2015년도에 김종석 연출의 에서 저는 그루쉐의 시어머니역할과 앙상블로 출연했었지요. 옴브레의 작곡이 매우 돋보였던 공연이었지요. 서강대메리홀 대극장에서 라이브연주로 합창과 땐스, 관객의 이동, 이라는 멋진 컨셉으로 공연은 대 성황을 이루었었지요. 그 공연을 통하여 브레히트 연극의 재미와 깊이를 더 한층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임형택 배우의 아쯔닥은 정말 깊이 있고 진정성있는 해석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출연하고 싶은 브레히트의 ‘코카스서의 하얀 동그라미 재판’입니다. 연출에 따라 다양한 변주와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열어주는 텍스트, 브레히트를 다시 한 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브레히트에 대한 소개는 연극 애호가에게 좋은 선물임이 분명하다.서양의 공연예술인 연극을 통해 안목을 넓히고 더욱 세련된 연극행위를 위해서 이재진 교수와 같은 분의 노력을 계속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재진 교수의 연극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랑이 담긴
브레히트 에세이 연재에 깊게 감사드린다.
또 다른 에세이를 통해 연극에 대한 피 끊는 열정을 기대합니다.
교수님,
두번 세번 곰곰히 읽어보아도 나눠주시는 것을 따라가기 벅찬 이유는 부족한 제자가 아마도 깊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브레히트는 그의 작품을 보이기에 시대를 잘 타고 났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오히려 시대상황으로 인해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5편 댓글에서 한번 언급하셨었지만, 독일에 아직도 브레히트 학회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후에 브레히트 붐이 일어났던 것은 차치하고라도, 어째서 그 열기가 지속되지 못했을까요 ?
사회주의가 오래전에 끝난 시대를 살고있지만, 앞서 말씀하신대로 브레히트의 공연의 매력이 무엇보다도 대중성이라고 한다면 시대나 이념을 막론하고 인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또한 케어(Kerr)가 ‘표현주의 작품 중 최고의 대열에 끼워넣을 수는 없다’고 말한 것 또한 그야말로 특정 사조에 갇혀 핵심을 꿰뚫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맥락에서 시인, 극작가 브레히트를 읽자는 운동은 아직 계속되는 중인지도 궁금하고요.
또 한가지, 브레히트의 상속인들과의 문제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시아나 남미에서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이유가 ‘가진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뚜렷한 갈등 구조’라는 이유가 훨씬 더 납득이 갈 정도로요. 지속적인 공연이야말로 작품의 생명력과 마찬가지일텐데, 어째서 상속자들이 그렇게나 큰 걸림돌이 되는걸까요 ? 작품의 삭제, 변형 등이 ‘어느 정도’로 자유롭고 ‘얼마만큼’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가 발목을 잡는것일까요 ?
너무 질문이 중구난방이지만, 분명 저처럼 궁금한 사람이 한명은 더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올려봅니다.
+이번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 분이 얼마나 무섭도록 대단한 작가인지 어렴풋이 느껴졌어요. 제목이 무거운 이유를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혼란한 시절이지만 오랜만에 조용히 곰곰히 많은 것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고요. 언제나 마음깊이 감사드립니다.
황현주씨,
나는 원래 댓글을 은근히 기다리는 편입니다. 답글을 이용해 전달이 충분치 않았거나 누락된 내용을 보충할 좋은 기회로 삼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주씨가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질문을 내세워 심하게 따지고 드니 쉽게 답하기가 힘들군요. 답변이 부족하다 싶으면 나의 개인 메일로 문의해 주구려.
1) 독일에 아직도 브레히트 학회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 가) 무엇보다 브레히트가 동서독의 이념적 틈에 갇혀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크노프 교수와 나는 상당히 가까운 친구입니다. 학회를 왜 만들지 않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지요. 벌써 꽤 오래되었군요. 동조자를 많이 찾을 수 없다고 말합디다. 나) 일반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독일도 연극에 대한 관심이나 열기가 예전처럼 그리 뜨겁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다) 참고로, 미국에는 물론 브레히트 학회가 있습니다. 초대 공동학회장이 아이러니하게도 “브레히트가 여인들의 머리뿐 아니라 몸도 갈취했다”고 심하게 비판한 퓌지 교수입니다.
2) 브레히트의 공연의 매력이 무엇보다도 대중성이라고 한다면 시대나 이념을 막론하고 인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 가) 이념을 벗어나 시인 브레히트를 읽자는 분위기는 20세기 후반(90년대)에 이르러서야 일어났습니다. 미국을 위시하여 일부 독문학자들이 “새로운 브레히트”를 찾아보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나) 우리에게 독일어를 가르쳐 주던 독일 여선생님이 브레히트의 시를 읽다가 울먹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브레히트는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에 납치된 독자나 관객을 끌어내려 했지만, 그 반대로 브레히트만큼 서정적인, 낭만적인 작가도 드물 것입니다. 브레히트의 연극세계는 한마디로 “모순의 모순”(변증법)입니다. 다) 나는 브레히트의 작품을 읽으면 그 독일 여선생처럼 이내 감상적인 세계속으로 빠지고 맙니다.
3)케어(Kerr)가 ‘표현주의 작품 중 최고의 대열에 끼워 넣을 수는 없다’
–>> 케어는 일생동안 브레히트를 표절자로 낙인찍으며 부정적으로 비평했습니다. 처음 작품이 발표되자 “재주는 좀 있지만 다른 표현주의 작가들의 수준에는 아직 못 미친다”라고 거리를 두었습니다.
4) 브레히트의 상속인들과의 문제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 가) 상속자들은 대부분 동독에 살고 있었습니다. 출판사와 힘을 합쳐 저작권을 내세워 브레히트를 지킨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나) 돈과 직접 결부되었기에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라도 더욱 강하게 저작권을 움켜잡았을 겁니다. 다) 특히 70년대 이후 독일무대는 작품을 심하게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여 말해 봅니다. 독일에 가서 그간 내가 연출했거나 번역했던 작품을 여럿 보았습니다. 연출자가 작품을 너무 심하게 변형시켜서 공연이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