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에서 ‘리더십’이 중요한 이유/ 우상전

한국연극에서 ‘리더십’이 중요한 이유

 

                                             우상전(연극배우)

 

 

지금 연극계의 ‘사회적’ 상황을 정리해보면,

 

1. 자본의 영세로 ‘지원금’ 의존도가 높은 것

2. 인재양성의 실패로 좋은 인력이 고갈된 것

3. 글로벌 정신의 미약

4. 사회와 역사의식결핍에 의한 현실정치이념에의 종속

5. 연극계의 리더십의 실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게 연극계를 리더해갈 리더십의 결핍이다.

 

첫째는 대학을 통해서 연극인이 양성되는 구조다. 그러니까 예술현장에서 선배들을 통한 도제교육이 자연히 미약해지고 학교선생들의 입감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연극판은 훌륭한 예술가가 되는 게 아니라, 교수가 되어 명예와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게 희망이 된 세상이 되어버렸다. 가난에 시달리다보니 안정된 수입과 발언권을 갖는 대학교수가 되는 게 꿈이 된 것이다.

따라서 대학에서 학위를 따야하고 그곳에서 직장을 구해야 하는 게 일반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니 뛰어난 예술가가 아닌 당연히 학위를 주는 교수가 연극계의 최고의 실세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변화되어 버린 것이다.

 

둘째는 관객을 상대하는 ‘흥행’이 연극계를 지배하지 않게 되니 자연히 연극평과 연극상 등이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심사와 평가를 하고 시상을 하는 위치에 있는 연극인이 당연히 ‘권력’(?)을 갖는 구도가 된 것이다.

 

셋째는 ‘지원금’과 ‘대관’이 창조의 밑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지원기관(정부기관)이나 각종 협회, 공공극장의 장 등의 단체장이나 극장장 또는 심사위원 등의 입김이 세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많은 연극인들은 자연히 ‘여론’과 ‘권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 자연히 ‘권력’을 갖는 개개인의 리더십이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우선 눈치가 만연해져 예술성의 훼손을 막기 어렵고, 리더 개인이 횡포를 부리거나 잘못된 판단을 할 경우에는 연극판은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게 마련이다.

관객이 보지 않는 ‘재미없는’ 창작극이 이런 리더들의 입김으로 ‘우수작’에 뽑혀 더욱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자, 이제 연극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지원금이 된 게 현실이다.

‘흥행’이 사라진 연극판에서 연말이면 무슨 상이 그렇게 많은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러니 연극의 다양성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비교적 경제적여유가 있는 공공극장들은 연극의 미래보다는 평가를 통한 자기들의 생존에 더 골몰해 ‘눈치보기’는 절정에 이른 느낌이다.

그리고 이걸 사람들은 공공성이라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박원순시장이 취임한 후 ‘정치적 이념’을 공연을 통해서 이루겠다는 세종문화회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몇 사람의 의중에 따라 또는 취향에 따라 명색이 예술인 연극이 정치에 종속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건 교육에서도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예술성보다는 권위가 더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 나처럼 아무런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떠들어대도 연극판을 움직일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많은 연극인들이 예술성보다는 지원금이 나오는 ‘정치’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지원금 설명회’에 구름처럼 사람이 모이고, ‘시상식’과 ‘단체장 선거’에 더 관심이 많은 게 작금의 연극계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예술성’을 외치고 있고, 자기들이 관여하지 않는 공공극장에는 순수성과 예술성, 기능성을 강요(?)하는 평가기준을 들이대는 게 일반화된 현실이다.

사회보장이 잘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자기 나라 대통령이나 수상이 누군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서 개개인의 인생에 치명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어 ‘정치’가 나라의 최대 이슈가 되어 이념싸움과 진영논리로 모든 세월을 허비하고 있는 게 한국의 정치, 사회 현실인 것이다.

 

  ‘꽃상여’가 주는 만족감 

 

요사이 나는 공공극장 공연에 관심이 많다. 그것도 ‘대극장 공연’에 말이다. 그건 연극이 이 땅에서 존속하려면 대극장 공연의 질이 좋아져야 하는데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게 바로 공공극장이어서 그렇다.

끝없이 수를 늘리며 번창하는 커피숍의 화려함만 보아도 그렇다. 젊은 연인 둘이서 1만원만 투자하면 깨끗하고 편안한 곳에서 몇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커피숍이다. 담소도 나누고 책도 읽고, 숙제도 하고 컴퓨터로 영화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한국의 현실에서 구질구질해 보이고 불편해서 다리를 뻗어 편히 앉아 있기도 힘든 소극장에서 허리를 비틀며 침묵을 강요하는 연극을 누가 보고 싶겠나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

따라서 한국연극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려면 대극장 공연에 대한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런데 가서 보면 정말 답답한 심정을 금할 수 없는 게 우리의 대극장 공연의 현실이다.

왜? 이마저도 한국연극의 ‘엘리트주의’의 망령이 지배해서 유독 연극만은 아직도 ‘재미없고 난해한’ 공연이 공공극장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둘째는 공공극장이 아무래도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충분히 재정지원을 받으므로 해서 아무래도 관객동원이나 매스컴 홍보에 강하다. 따라서 이런 대극장 공연이 많은 관객을 동원해 놓고 ‘답답한’ 공연을 남발할 경우에 연극은 ‘재미없는 것’이라는 일반관객들의 여론이 확산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공공극장의 ‘대극장 공연’이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자연히 관객들의 외면으로 연극은 여전히 시상과 평론가들의 평가로 유지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대중성을 확보하면 질적인 예술성이 떨어지고, 예술성을 확보하려고 나서면 대중성이 떨어져, 자연히 연극은 관객들에게 하룻밤을 투자하기에는 아까운 장르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런 실정에서 임형택연출의 ‘꽃상여’는 대극장 공연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어 반가웠다. 독특하고 세련된 연출문법에다 무대장치의 효율성. 춤과 음악을 섞어 누구도 지루하지 않게 관극을 할 수 있게 만든 배우들의 앙상블이 볼거리를 제공하는 공연이었다.

진부할 수 있는 내용을 공감과 한국적 정서와 시대적 감각을 적절히 구사해 재미마저 있는 감동의 무대로 만든 연출가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게 우리 연극은 어느 날부터 연출이 자기만의 표현문법을 가지면, 이른바 내러티브를 잃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자리를 잡는 현실에서 이 공연은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무용인지 연극인지를 알 수 없게 해, 보는 관객들에게 연극의 흥미를 잃게 해 극장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있었던, 이런 연극들이 좋은 평가로 각광을 받고 ‘시상대’에 오르던 게 숨길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임형택 연출은 자기의 연출문법을 살리면서도 ‘꽃상여’의 이야기 구성을 잃지 않아 관객들에게 소통의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 한국연극의 고질적인 ‘구성상의 맹점’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정도의 완성도와 관객을 향한 집중력이면 누구나가 대극장 공연을 즐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무대를 꽉 채워주는) 공연이었다. 그래서 나는 요사이 본 공연 중에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거기다 우리의 정서를 알게 하는 장면의 구성들은 해외로의 ‘수출품’으로도 손색이 없는 짜임새를 갖춘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객석에 불이 들어오자 내 앞줄의 중년 부부들이 ‘재미있고 볼만하다’며 공연에 대한 만족감을 연신 남발(?)하고 있었다. 극장을 나오는 관객들에게 ‘만족을 주는 대극장 공연’, 이게 한국연극의 생존의 법칙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런 ‘대극장 공연’의 희망을 안고 있는 내가 계간지 ‘공연과 이론’이 다룬 ‘공공극장’에 대한 연극인들의 좌담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연극인들의 대담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 왜? 이와 같은 이론가들의 공공극장에 관한 좌담은 한국연극의 생존과 리더십의 향방을 연결시키는 ‘바로미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공극장 정책에 대해서 말하다”

 

좌담의 글을 읽다가 ‘공공’이라는 명칭은 (아직도 우리의 연극이론 세상에서는) 중요한 연극공연장으로서의 미션, 그리고 사회적 가치 창출, 연극에의 공헌도와 같은 솔직히 예술 외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연극판의 세력장악이라는 ‘정치적 논리’(?)까지가 개입하는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할 수 있겠구나 하고 느꼈다면 이건 나의 과잉반응일까?

다시 말해 공공극장이 순수한 예술성이나 관객과의 접근으로의 관심보다는 외적인 한국연극의 리더십의 주도권이 개입하는 장(場)이라는 선입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인식을 받았다. 일단 공공극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은 정부지원금’을 사용할 수 있는데 따른 어떤 ‘목적성’을 갖지 않을 수 없는 한국연극의 현실이 되었다는 느낌말이다.

이건 세종문화회관의 사례에서도 충분히 반추되는 일이다. 오히려 독재정권시절에는 독재라는 자신들의 약점으로 나름 신중이라도 기했지만, 이제는 당당히 자기들의 정치적 소신을 반영하겠다고 나서니 더욱 왜곡되고 있는 게 공공극장의 현실이다. 그래서 말이 좋아 공공성이지 독재시절보다 더한 ‘목적극’이 횡행하고 이를 이루기 위한 주도권 쟁탈이 공연계의 물을 흐리게 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예산을 만들어) 운영하는 주체인데, 민주주의(?)를 내세워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게 관례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공연과 이론’의 토론에서도 이런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공공극장은 당연히 미션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무언가 사회나 연극계에 이바지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무엇으로 사회와 연극계에 공헌할 것인가를 숙제로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누가’ 할 것인가다. 혹여 운영자의 잘못된 생각이 자칫하면 운영자 개인의 ‘도그마’를 만드는데 작용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다.

공공극장이기 때문에, 또 넉넉한 재정으로 운영되는 극장이기에 민간극단과는 다른 미션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 언뜻 들으면 옳은 발상일 것 같지만, 자칫하면 예술성을 앞세워 흥행을 뒤로 하고 관객을 외면하는 예술가의 양성에 몰두할 수도 있는 오류를 불러 일으켜 연극계를 더욱 참혹하게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정권이 바꾸면 통치자가 자신의 통치철학을 내세우듯이 공공극장도 이렇게 운영되어야 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속에 잘못된 개인적 이념이 똬리를 트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앞선다.

가령 예술성만 해도 그렇다. 남산예술센터는 공공인 서울시의 문화재단이 운영주체이니 일반 민간극단처럼 공연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오로지 창작극의 육성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 뜻은 너무나 좋으나, 좋은 창작극이 나오지 않거나, 그나마 작가들이 창작극을 생산하지 않으면 그때는 극장을 쉬어야 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때는 마냥 극장을 놀리고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내세운 미션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당연히 일어날 비판과 원성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뒤따른다. 왜? 내세운 공공성을 훼손하면 외부의 지탄을 받아야 하는 딜레마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거기다 두산아트센터도 똑같이 이를 목표로 하면 창작 작가가 부족한 현실에서 그나마 양분하게 되니 더욱더 운영하기 힘들어지는 곤경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인데도 우리의 공공극장은 미션을 강요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누군가 눈여겨보고 있다가 ‘보아라, 미션을 망각하는 작태를!’ 하면서 극장에 집중적인 비난이라도 퍼부을 양이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극장과 운영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솔직히 ‘공연과 이론’의 공공극장의 토론을 보면서 당황스러웠던 것은 이 잡지의 발행인과 편집주간이 ‘대표 토론자’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발행인이 자신의 주장을 펴고 싶으면 별도로 자기의 ‘란’- ‘발행인의 변’ 등을 마련해 자신의 논리를 펴는 게 공정한 직업윤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배들의 토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편집 시에 “이건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구를 삽입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당사자들이 나서서 토론자들의 의견을 윽박지르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결론을 내는 것은 요즘의 우리 연극현실을 보는 듯해 안타까웠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장으로서의 미션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이게 이른바 한국적 현실인 ‘전임교수 리스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기에 충분했다. 또 이런 현실이라면 한국연극의 리더십은 ‘기대가 난망’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토론의 종결자(?)가 “지금까지 나온 얘기를 보자면 현시점에서 공공극장마다 고유한 방향성을 정하도록 해야 할 것 같고요. 공공극장에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혜택이 소수에게만 돌아가지 않도록 구체적인 대안과 대책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또, 공공극장 운영에 대한 ‘평가기준’을 다시 설정하면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토론자들과 다른 편집방향(?)을 사회자가 임의대로 눈치껏(?) 결론을 내버리는 모습은 지성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더구나 한국연극의 최고의 지성을 자부하는 사람들이 – 평가와 심사를 주로 하는 평론가들이 모인 곳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지배한다면 연극판이 평가와 심사. 지원금으로 점철되는데, 여기서 누가 누구를 믿고 작업을 할 수 있을까하는 – 믿음과 신뢰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보기에) 발행인과 편집인의 발언보다는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젊은 연극인들의 논리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져 여기에 소개한다.

 

“프랑스를 일례로 든다면 공공극장이 해야 할 일이 예술을 향상시켜야 하고 국민의 교양, 최소한의 인문학적인 것을 담보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새로운 종류의 극을 할 수도 있고요.”

 

“공공극장이, 그 기획이 자꾸 자기가 해야 할 것들이 아닌데도 하고 그러는 거예요. 남산예술센터에서 굳이 극작특강을 하는 거죠. 자기 극장의 존재 이유를 보여 주어야 하니까. 극장들이 많아져서 각각의 길을 찾는 것이 어려운 현실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공공성의 기준이 굉장히 햇갈려요. 극작가, 연출을 키우는 등의 제도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상업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좋은 공연을 말하는지, 그러니까 자기 극장에 어울리지 않는 행사를 자꾸 여는 것, 이것은 공연만 올렸을 때 자신감이 없으니까 내세우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극장이 문화센터 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러시아는 하나의 극장의 한 해 예산이 대학로 한 해 규모인 200억을 넘거든요. 그리고 고전도 올리고 참신한 극도 올리고요. 전속연출가들이 몇 명이나 되고, 5년에 몇 작품 이런 식으로 계약하고, 배우는 당연히 있고요. 이런 선순환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주는 것이 당위적인 공공성을 만족시키는 방식이 아닐까.

작가들이 내 작품이 어떤 극장에 올라가서 그걸로 먹고 살 수 있다면 문화센터화 되지 않겠죠. 극장이 극장으로 생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극장의 공공성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16세기 셰익스피어를 하면서 공공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요?”

 

“독일 이야기를 해볼게요. 독일은 주류가 공공극장이에요. 그런데 공공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도시가 있고 극장이 있고 예술감독 내지는 극장장이 운영하고 거기에 소속된 배우, 연출가가 있고 그들이 자유롭게 레퍼토리를 만들어서 굴리는 시스템이거든요. 한국하고 너무 달라요. 독일에서 국립극장, 즉 시립극장이 굉장한 아성인거예요.

왜냐하면 극장장으로 연출가가 들어가면 그에 딸린 사람들이 들어오거든요. 그리고 예술성과 대중성, 상업성 이야기를 하셨는데 예술감독의 고민은 그거예요. 그들은 어떻게든 예술적으로 인정을 받아서 더 큰 도시로 가고 싶어 해요. 공연을 만들어서 흥행을 못시키면 그것도 재계약이 안 되는 요소거든요.

예술성을 담보하면서 철저하게 대중성도 확보하지요. 국립극장이 아닌 자유극단들은 자기들끼리 공연을 해요. 열악한 환경에서 독일의 시스템이 좋아보여도 그렇게 막혀있는 문제가 있어요.”

 

“공공극장이라는 말은 난센스인 것 같아요. 국립극장은 나라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국립극장인데, ‘너희들은 공공성을 가져야 해’를 요구할 수 있는지? 사설극장은 공공성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는지? 예술 자체가, 연극 자체가 공공적인 것이기 때문에 공공성의 주인은 예술이지 극장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국립극장에 요구할 것은 좋은 공연을 올릴 수 있는 인프라와 레퍼토리. 극단을 소유하고 있고 연출가를 소유하고 있고 이런 탄탄한 구조를 만들어주는 것을 나라 돈으로 해주는 것이 국립극장 아닌가요?”

 

“공공극장의 평가항목들, 기준, 그런 것들을 다시 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사실 그것들 때문에 다들 움직이는 거거든요. 예를 들어 극장의 다양성과 극장의 고유성은 무엇이냐.”

 

“선생님이 보시기에 항목들은 괜찮나요? 평가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면 항목들은 공공성이라는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나요? 공공성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가요? 저는 공공성이라는 말을 예술에서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공공성을 강화가 아니라 공공성을 없애야…”

 

솔직히 나는 이런 말을 한 사람들과 ‘통성명’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하형주, 김정섭, 백승무, 홍창수, 이 발언자들 말이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신선한 젊은이들의 발언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대조적으로 나와 ‘통성명’을 한 연극계 인사들의 발언은 내용전달이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명확성도 없고, 외려 앞서 말한 ‘전임리스크’를 강하게 느끼게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글로 남겨지는 증거가 아니라도, 숱한 (이에 관한) 루머가 펴져 있는 게 연극세상의 현실이다. 하지만 ‘소문’을 그대로 글로 남기는 것은 너무나 커다란 부작용을 남길 것 같아 자제하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풍토를 지속하는 한 연극세상에서 좋은 리더십을 얻기는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젊은이들이 세월이 갈수록 연극판에서 ‘세속화’되지 않기만을 간곡히 빌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기득권’이 연극판의 발목을 잡고 있나? 

 

술자리에서 나는 젊은 연극인들에게 가끔 이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어떻게 된 세상이 나 같은 이미 ‘낙엽줄’에 든 사람이 이런 쓴 소리를 하고 다녀야 하느냐! 젊은 사람들이 나서서 개혁을 외치고 고정관념의 탈피를 외쳐야지, 이미 기성세대인 내가 지껄이니 파워도 없고 성과도 없는 것 아니냐.”하고 말이다.

솔직히 개혁과 혁신, 저항은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닌가! 그런데 연극계는 불행이도 이런 젊은이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언제부턴가 연극계는 사상적으로(?) 획일화된 세상이 되었다. 솔직히 나는 무언가가 이 판을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원로여서, 선배여서, 대표여서, 회장이어서, 아니면 관직을 노리고 등등

언제부턴가 이의 부작용으로 연극판에도 패배주의와 무관심이 횡행하는 세상이 되었다. 마치 대세를 따르지 않으면 자신이 소외자로 남을 것이라는 세속이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행위자의 열정과 에너지가 사라진 곳에서 어떻게 명색이 예술인 연극이 창조예술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겠는가?

혹 모두가 학교의 ‘전임타령’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용히 지내다 대학에서 일자리나 하나 얻으면 된다는 무사안일주의가 지배하는 곳은 아닐까. 이게 대학에 연극과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연극인의 사고방식으로 자리를 잡는 일반화된 현상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후배를 윽박지르고 자신들의 ‘목적성’을 위한 토론회가 일상화된다면 솔직히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이를 마지못해 관용하는 이런 풍토에서 어떻게 새로운 사고가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출연한 별 볼일 없는 연극을, 어느 젊은 연극인이 글로 극찬을 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때 들은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얼마 전에 그 친구가 전임이 되었잖아요. 아마 그에 대한 보답으로 칭찬을 했을 것예요.” 솔직히 연극대학이 많아지고 나서 이런 부작용(?)으로 한국연극의 리더십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 본다.

 

             평가가 만능인가?

 

연극판의 엘리트들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입만 열면 ‘평가’다. 뭐든지 평가를 하고 이를 위해 심사를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이는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겠다는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상을 현장의 연극인들에게 주고 있다.

사실 연극을 포함한 예술에서 잘못된 평가는, 특히 개인의 오판은 예술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연극판이 평가를 멈출 수 없는 게 바로 ‘지원금’이나 극장 대관, 연극상을 주기 위한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관행 하에서 잘못된 리더십이 발휘되면 연극판은 불행을 면치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이게 관행화되고 더 나아가 심화되면 어쩔 수 없이 연극계는 엄청난 부작용에 시달려야 하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예술에서의 ‘평가’는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정석이고, 해도 아주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 왜 예술에서의 ‘평가’가 위험한 일인가?

원칙적으로 예술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술은 예술가 개개인의 자발적 창조의 결실이다. 따라서 누구도 이를 평가하기는 힘들다. 잘못하게 되면 엄청난 부작용을 유발한다. 이에 따른 아첨과 부조리는 물론이고 예술성의 획일화에 따른 다양성이 사라져버릴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본주의에서의 예술은 시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연극은 상업성(대중성)이 연극인들의 주된 경제적 수입원이 되고 있는데, 이게 연극계 내부의 평가나 매스컴, 평론가들의 입김으로 인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상업성을 추구하는 몇몇 공연의 제작자들은 흥행수입으로 수억대의 수입을 올리고 풍요를 누리고 있는데, ‘평가’에 주눅 들고 그들에 의해 교육된 ‘엘리트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대다수의 연극인은 생활인으로서의 생존을 이미 박탈당하는 비참한 현실에 놓여 있는 현실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셋째는 평가자들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이다. 과연 그들이 평가를 할 자격을 갖추었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평가를 하려면 현장에서 직접 창작활동을 하지 않는 국외자가 평가를 해야 ‘객관성’을 확보해 공정하다고 알고 있다. 이런 한계로 인해서 직접 창작활동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인 이론가나 평론가들이 주된 평가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약점은 현장 감각에 서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적으로 연극을 자주 관람하는 ‘고급관객’의 수준에서 벗어나기 힘든 게 현실이다. 다시 말해 창작경험이 없는 관람 경험이 많은 관객이 현장예술가나 공연을 심사하는 꼴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공정성은 제하고라도 전문성에서 문제가 많은 게 현실이다.

 

여기서 부터는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지금 연극의 이론가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연극의 교육에 관한 것이다. 지금 대학교육의 질적 저하나 비현실성, 비실용성이 연극계의 ‘평가’보다 더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많은 교육생들이 연극보다는 연예기획사를 찾고 있으며, 뮤지컬에 더 전념해 연극교육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게 현실인데도 어째서 이에 대한 토론이나 개선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없고 연극계의 ‘평가’에만 몰두하는가가 나의 불만사항이다.

이 사항에 대해 핵심에서부터 설득요령, 교육의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개선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교수들은 가장 중요한 교육의 미래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지엽적인 문제에는 ‘평가’를 내세우며 비판을 가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다음의 사항도 그렇다. 지금 연극계에서 가장 긴요한 일은 ‘평가’가 아니라 ‘창조’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가 없는 평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평가가 없어도 창조는 존재하지만 창조가 없는 평가는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를 위한 논의가 활발해야하고 이를 위해 우리는 더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연극계는 직업적 안정을 목표로 창조보다는 평가에 종사하려는 꿈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창조자보다 평가자가 더 우대를 받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다.

이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경제를 창출하는 경제종사자보다 이를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 정치가나 관료가 더 대우를 받고 권력을 행사해서 대학이 ‘고시촌’이 되어버린 현실 말이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창조경제’를 아무리 외쳐도 이에 헌신하려는 사람은 없고 평생직장을 얻으려는 공무원이 되려는 젊은이만 늘어나서야 한국사회의 발전은 암담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를 똑같이 따라가고 있는 게 연극세상이다.

 

             연극인들의 자세

 

이런 풍토를 거부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현장 연극인들이야말로 더욱 심각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현장인들은 이런 풍토에서 자신들이 어떤 태도와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인가를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현장인들도 자기 허물에는 눈을 감고 ‘남의 탓’만을 남발하는데 더 열을 올리고 있다. 그것도 뒤에서 구시렁대기만 하니 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1. 우선 남의 의견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2. 지원금이나 대관의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 제도를 바꾸는데 전력을 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해도 되도록 관객들과의 소통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3. ‘옥탑 방 고양이’나 ‘라이어’, ‘보잉보잉’과 같은 상업극을 무조건 멸시만 하지 말고, 결과물에 대한 성찰과 더 나은 방향으로의 발전을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외려 현장인들이 더 경멸을 하고 지원금에만 목을 매니 이런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연극계가 지원금에만 목을 매면 맬수록 현실은 안정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허세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는 게 진실이다.

따라서 현장인들은 기존의 연극 세상에 종속되어 따라갈 것이냐 아니면 주체성을 가지고 새로운 장르나 방법론을 개척해 나갈 것인가를 깊은 고뇌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주당 바이러스’ 공연에 대한 소감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은 내가 ‘반(反) 엘리트주의자’를 주창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연극의 리더십이 ‘자기만족’ 외에 아무런 소득도 없는 ‘엘리트주의’에 끌려 다니는 것에 불만이 많다. 그렇다고 한국연극에서 ‘엘리트주의’가 성과를 내고 있는 것도 없다. 시대의 트렌드를 읽지 못해 관객들과 겉돌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가장 모순되는 게, (내가 보기에) 연극인들의 상당수가 진보성향을 띠고 있는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진보주의자들이 취할 태도는 무엇인가? 선거 때 지지후보에 서명하면 진보인가를 스스로 따져보아야 한다.

나는 자신들이 연극인으로서의 진정한 진보라고 여긴다면 ‘대중들의 이야기로 대중들을 즐겁게’ 하는 정신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진보라면 우리 연극에서 대중을 즐겁게 하는 장르를 개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한국연극인들은 자신들이 진보라면서 실제적으로는 보수적 ‘부르주아적 문화’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부조리에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무늬만 진보’인 셈이다. 살짝 속을 들추면 ‘골수 보수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진보정신을 마치 이념화된 정치개념으로 믿고 있거나, 그저 진보성향의 정치가를 지지하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른바 ‘뒷골목’ 연극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당 바이러스’를 보고 느낀 게 많았다.

먼저 이 공연에서는 열과 성을 다해 무대에서 자기를 던지는 배우를 볼 있었다는 것이고, 다음은 이에 환호하는 대중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 정신은 보수이면서 개념만 있는 ‘사이비 진보’나 ‘엘리트주의자’들은 벌써 내 이야기에 이마를 찌푸릴지 모르지만 말이다.

 

             새로운 장르의 개발

 

모노드라마 ‘주당 바이러스’를 보면서 이런 종류의 연극을 ‘장르화’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조그마한 소극장에서 배우 개인이 충분히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는 연극공연 말이다.

그러니까 우선 명칭부터 ‘모노드라마’가 아닌 ‘악극’이나 ‘마당극’으로 이름을 붙이듯 어떤 명칭을 붙여 기존 연극형식과 차별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 관객들이 장르를 쫒아 극장을 찾고, 만드는 사람들도 자기 장르의 특징을 인지해 연극을 만드는 것이다.

한팩뷰 8월호에 장지영 국민일보기자가 일본 전통예능 ‘라쿠고’(落語)를 소개하고 있다. 화술을 토대로 1인 만담으로 다양한 소재를 손짓, 몸짓, 표정 연기로 객석을 웃게 만든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이를 아끼는 관객들이 존재하며, 이게 일본 코미디연극의 (‘웃음의 대학’과 같은) 밑바탕이 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마치 우리의 판소리가 혼자서 연희를 해 관객들을 즐겁게 하듯 우리도 현대판의 새로운 연극 ‘장르’를 개발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니까 재담에 가까운 대사와 객석과 직접 교감하는 연희적 요소- 춤과 노래를 포함하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유의 한국적 정서인 신파적 요소를 가미해 관객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친정어머니’ 등 문학을 위시한 모든 장르에서 신파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배우들 중에서 자기의 ‘끼’를 부리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자를 발굴할 수 있고 그런 기회를 확장해 간다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되레 창작극에서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스타’를 뮤지컬처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구미를 당기는 것은 적은 제작비로도 공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TV의 ‘개그’ 프로보다 더 재미있고 나름 문학성도 가미된 연극적 특성을 가진 장르를 개발하는 것이다.

‘주당 바이러스’를 보면서 이런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지금 세상의 트렌드는 배우가 무대에 나와서 마냥 지껄이기만 해서는 전혀 감흥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연극처럼 배우의 출중한 개인기에다 객석과 직접 교류하는 – 직접 관객들을 무대에 내세우기도 하는 연출을 통해서 재미와 나름의 감동을 선사하는 장르를 개발한다면 우선 지원금에 의존하면서 관객들 머리만 아프게 하는, 별 내용도 없는 ‘엘리트주의’를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수입이 없어 쩔쩔매면서 자신은 대단한 예술가인양 자기모순에 빠져 애매한 삶을 사는 ‘무늬만 진보’인 연극인을 창출하기보다 사회적 가치나 기여도 면에서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지금 연극세상은 개인기도 보이지 못하는 배우들이 별스런 구성도 갖추지 못해 재미도 없는 연극을 좁다란 소극장에서 지원금에 의존해 공연하면서 관객들에게 전혀 감동도 주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면서 입만 열면 ‘진보타령’을 해댄다. 하지만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새로운 장르의 개발로 관객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리더십의 창출이다. 물론 이런 내 이야기에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엘리트주의자’들이나 ‘엄숙주의자’들은 코웃음을 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색안경’을 벗고, 땀을 흘리며 열연하는 배우와 이에 감동과 재미를 맛보는 관객들의 광경을 주시하면, 어째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를 숙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에 대한 평가를 즐기는 사람들 일수록 자신들에 대한 평가에도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에 와서 후회해 볼들 소용이 없지만 뮤지컬이 움을 트기 시작할 때, 그들은 연극의 ‘상업화’와 ‘엘리트주의’에 대한 평가를 냉철히 시도했어야 했다. 정말 그들이 진정한 평가의 전문가라면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에 대한 평가에 무관심했다. 아니 외면했다. 그래서 얻어진 게 무엇인가?

             ‘고령화 사회’에서의 리더십의 재편

 

장민호선생은 39세에 국립극단장이 되셨다고 한다. 오늘날, 연극인에게 서른아홉이란 나이는 돈이 없어 장가도 못가고 선배한테 따귀나 맞을(?) 나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 나이에도 국립극장의 책임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분이 80이 넘으셔서 돌아가셨으니 자그마치 40년 이상을 연극계에서 대접받는 고위직(?)에 계셨던 셈이다. 또 50대 중반쯤에는 이미 예술원 회원이 되신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 요즘 50대들은 초조감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마음이 급할 것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7080의 원로 분들이 여전히 연극제의 ‘심사위원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형편이니 답답하기도 하고 조급증도 날 것이다.

아무리 연극잡지와 사이트를 만들어 활동을 해도 겨우 이메일밖에 못 다루는 어른들이 ‘고령화 사회’의 행운을 누리면서 요직을 다 차지하고, 적당히 정치권에 얹혀 리더십을 장악하고 권세를 누리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절망이 끝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될 것 같은 문재인후보를 밀어도 보았지만 그마저도 대권을 쥐지 못했으니 펼칠 길이 없어 더욱 절망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쉽게 끓는 냄비 식을 때도 빠른 법’이라고 했다.

따라서 무쇠처럼 힘들게 달구어지면 당연히 온기도 오래가는 법이다. 이걸 믿고 리더십을 다듬어가고 찬스가 올 때를 대비해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미진해 보인다.

예를 들어 공공극장만 하더라도 평가만 하려들지 말고 대안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왜? 지금 연극의 활성화를 도모할 곳은 공공극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사이 이렇게 좋아진 환경에서 어느 누가 좌석도 불편한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싶겠는가?

따라서 자신들이 연극계의 리더가 되고 싶다면 ‘내가 이들 극장을 운영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며, 어떤 실천을 할 것인가’를 명확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리더로서 자격이 있다. 그래야 선배들을 물리칠 수 있다. 지금 7080에도 공공극장을 맡겨만 주면 잘하겠다는 사람이 즐비한데 말이다.

그래야 나 같은 사람도 적극적으로 글을 통해서 후원을 하고, 직접 나서서 옹립을 떠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연극판은 나이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안에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다. 한마디로 청사진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고, 소리 없이 조용히 꼼수만 쓰려고 드는 인상을 주는 사람만 넘쳐난다. 핑계는 글을 잘 쓸 수 없어서라고 하지만 결국은 아이디어가 없어서다.

솔직히 국립극단이나 명동예술극장, 세종문화회관 등을 세계적인 극장으로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한국에서 대통령후보에도 오를 수 있는 인재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원래 배우 출신이다.

그는 미국의 배우노조(유니온)를 맡아 지금과 같은 완벽한 틀로 완성시킨 인물이다. 결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이 된 후에, 소련을 붕괴시켜 동서의 냉전을 해소해, 세계가 핵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한 20세기 최고의 통치자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본격적인 연극계의 리더를 꿈꾼다면 이 정도의 포부는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젊은 리더들에게는 청사진이 없다. 맨 날 자기 편리한 대로 지껄이고 다닐 뿐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7080을 아직도 누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 밥도 못 찾아 먹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연극연출가 심재찬은 한국에서 처음 생기는 예술인 복지재단을 맡아 이런 불상사 없이 제대로 운영, 완성했더라면 예술계의 대단한 인재로 추앙받고, 연극계의 경사인 인재 탄생의 쾌거를 이룰 뻔한 인물이었다. 경위야 어떻든 연극계로서는 너무 아쉬움이 크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리더십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왜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쳤는가를 분석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어차피 세월이 가면 세대교체는 이루어지고 태어나면 죽게 되어 있다. 따라서 망해가는(?) 연극의 리더를 꿈꾸는 젊은 연극인들은 평범한 범인(凡人)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연극의 절망적인 현실이 되레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인 ‘찬스’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느 원로 분이 나를 보더니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이봐, 자네가 그런 글을 쓰면 어떤 반응이 나오나? 솔직히 몹시 궁금해.”

“아무 대꾸도 반응도 없어 모르겠습니다.”

“정말?”

실제로 나에게 어느 작품에 출연하느냐 아니면 연습하느냐고 묻는 질문보다 어느 대학에 출강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더 많다.

이래서야 어떻게 절망에 빠진 연극계에서 세대교체를 이루어 리더십을 발휘할 될 수 있겠는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미 늙어 선배가 사라져 찾아오는 리더십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런 구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 한국연극에서 리더십이 실종되는데 공헌하고 있는 것 중에 또 하나가 연극계의 정치적 편향성이다. 이로 인해 연극계의 리더십은 더욱 엉망진창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우선 현실정치에만 관심이 쏠려 예술집단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너무 길어 다음 호에서 다시 시작해 보겠다.

2 thoughts on “한국연극에서 ‘리더십’이 중요한 이유/ 우상전

  1. 우상전 선생님, 연출하는 채승훈 입니다. 안녕하시지요. 형의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연극계의 여러가지 사안에 대한 형의 심층적인 분석들, 무척 놀랍습니다. 또 많은 도움이 됩니다. 단, 다양한 이야기들이 중첩되니까 너무 길게 느껴지고 초점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가지 주제로 단순하고 힘있게 그리고 길지 않게 서술해주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집약된 주제로 토론도 이어지고 할텐데요. 지금으로서는 어디다 초점을 맞추고 토를 달아야할지 좀 난감합니다. 건투하십시오.

  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래전 글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고민 되는 문제 같습니다.연극계 모든 분들이 다들 더 고민 하셔야 할 일이겠네요.. 저도 생각할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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